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돈화문의 문턱을 넘어서면....
창덕궁 제2의 문인 진선문 가는 길.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진선문을 들어서는 관람객들.
진선문 문턱을 넘어서면 정면으로 낙선재로 들어가는 숙장문과 왼쪽으로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보인다.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
낙선재로 바로가는 숙장문.
인정전의 웅장한 모습.
인정전 뜰에서 본 인정문.
아름다운 전각의 모습.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람객들.
대조전.
창덕궁는 크고작은 건물이 많이들어서있다. 창덕궁의 근정전에 딸린 전각들을 들러보고 나오면 창덕궁의 후원과 낙선재로 가는 갈림길이나온다.
창덕궁< 昌德宮 >은 조선< 朝鮮 > 태종< 太宗 > 5년(1405) 이궁< 離宮 >으로 지어진 궁궐로서, 그 뒤 여러 차례 보완< 補完 > 공사< 工事 >가 계속되어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 < 敦化門 >이 건립되었고 세조< 世祖 > 9년(1463)에는 약 62,000평이던 후원< 後園 >을 넓혀 총 150,000여 평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소실< 燒失 >된 것을 선조< 宣祖 > 40년(1607)에 중건< 重建 >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光海君 >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 仁祖反正 > 때 인정전 < 仁政殿 >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 殿閣 >이 소실되어 인조 25년(1647)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후에도 여러 번 화재< 火災 >가 있었으며, 1917년에는 내전< 內殿 >이 소실되어 경복궁 < 景福宮 >의 교태전< 交泰殿 > ·강녕전< 康寧殿 >·동서행각< 東西行閣 > 등 많은 건물을 이건하였다.
창덕궁< 昌德宮 >은 광해군 때 정궁< 正宮 >으로 쓰게 된 뒤 약 300년 동안 역대< 歷代 > 제왕< 帝王 >이 정사< 政事 >를 보살펴 온 곳이다. 현재 인정전 < 仁政殿 >과 그 주위의 회랑< 回廊 >을 비롯하여 대조전 < 大造殿 >과 낙선재< 樂善齋 > 등 궁내< 宮內 >의 주요 전각< 殿閣 >은 창덕궁< 昌德宮 > 내에 13동, 비원< 秘苑 > 내에 28동이 있다. 없어진 건물은 인정문 < 仁政門 > 앞의 회랑< 回廊 >, 인정전과 대조전의 부속 건물, 낙선재 앞 건물 등 극히 작은 부분으로 장중< 莊重 >한 왕궁< 王宮 >의 규모< 規模 >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의 규모는 131,781평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궁궐< 宮闕 > 후원인 비원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고궁 중 하나이다.
비원< 秘苑 >은 태종< 太宗 > 5년(1405) 창덕궁< 昌德宮 >을 창건< 創建 >할 때 후원< 後園 >으로 조성< 造成 >되었으며 창경궁 < 昌慶宮 >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대부분의 정자가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 殿閣 >들은 인조 원년(1623) 이후 역대< 歷代 > 제왕< 帝王 >들에 의해 개수< 改修 >·증축< 增築 >된 것이다. 이곳에는 각종< 各種 > 희귀< 稀貴 >한 수목< 樹木 >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어정< 御井 > ·연못 등이 있다. 역대< 歷代 > 제왕< 帝王 >과 왕비< 王妃 >들은 이곳에서 여가< 餘暇 >를 즐기고 심신< 心身 >을 수양< 修養 >하거나 학문< 學文 >도 닦았으며 연회< 宴會 >를 베풀기도 하였다.
비원< 秘苑 >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傳統 > 조원시설< 造苑施設 >으로 자연적< 自然的 >인 지형< 地形 >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 造化 >있게 건물< 建物 >을 배치한 왕궁< 王宮 >의 후원< 後園 >이다. (사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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