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관(獨立館)은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의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영빈관의 하나인 모화관 건물을 1894년 (갑오경장)이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독립문과 함께 독립사상을 표현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독립관은 지산1층 한식 목조건물로서 정면6칸 측면4칸 7량 팔작지붕 구조였으며, 원래 위치는 동남쪽으로 약350미터 지점이었다. 서대문독립공원조성사업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지상층은 당초대로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의 위패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은 행사 및 유물보관을 위해 1995년 12월 28일 부터 1996년 12월 31일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건립하였다. (안내문에서)
독립문과 서제필 선생상.
독립문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문화재청 자료)
서대문구 안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옛 서대문 형무소로 사용되던 건물을 지키는 붉은 벽돌담장이 높기도 합니다. 감시 망루까지 있어 우리나라 독립투사인 안중근의사 유관순열사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처형된 가슴시린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