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행촌동 성곽길에서 본 인왕산 범바위-정상 방향으로 본 서울 성곽.
북악산 방향으로 본 서울 성곽.
남산 방향으로 본 서울 성곽.
범바위 입구의 서울 성곽. 이곳에서부터 범바위-정상 구간은 현재 복원공사로 진입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여기에 보이는 서울성곽은 인왕산의 서울성곽으로 사직공원 뒷편 사직터널위에서부터 인왕산 정상까지의 모습입니다. 인왕산 정산부분은 지금도 성곽복원공시가 진행중이며 5월 말경에 이곳 인왕산 정상부 성곽복원공사가 완료될것이라고 합니다.
서울성곽은 사적 제10호. 둘레 약 17㎞. 조선왕조는 1394년 11월 한양으로 천도하여 궁궐·종묘·사직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다음해인 1395년 9월까지 대체적인 건설을 끝내고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성곽을 쌓기로 했다. 공사는 1396년(태조 5) 1월부터 시작하여 49일간 지속되었다. 이때 각 도로부터 동원된 인부는 11만 8,000여 명으로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성벽 바깥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지금도 남산 동쪽의 성벽에는 그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성곽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기초석이 장대하고 성벽이 수직형이며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메꾸는 등 그 축성방법이 조잡했다. 성의 기초부분이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하여 높이 15척, 총연장 1만 9,200척이었고,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했는데 아랫단의 너비가 24척이며 윗단의 너비가 18척이고 높이가 25척으로 총연장 4만 300척이었다. 요컨대 이 공사는 짧은 기간에 17㎞ 이상의 장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전라도·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하여 2차 공사를 시작했다. 2차 공사는 동대문 부근 등 봄철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곳의 완축과 여름철 장마로 무너진 곳의 개축, 그리고 낮은 성의 보수, 성문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아울러 도성의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는 1차 공사에 대한 보수·완성을 위한 공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사는 그해 9월 24일 종료되었지만 그후에도 군인·승도 등에 의한 부분적인 보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울성곽이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422년(세종 4)에 와서야 가능했다. 서울성곽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성을 모두 돌로 완벽하게 쌓았다. 둘째, 성가퀴(女墻)를 높게 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셋째, 수문(水門)을 증설했다. 넷째, 성문을 개수하거나 옮겨서 설치하여 도성 출입문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다섯째, 성 주위 안팎에 큰 길을 내었는데, 이는 순찰과 유사시의 대비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다. 여섯째, 성 주위를 확장했다. 한편 도성문으로는 숭례문(남대문)·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숙청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덕문의 이른바 8대문이 있었다. 도성을 보수하는 책임관청으로는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했다. 그리고 도성의 수호와 경비를 위한 기구로 병조 예하에 도성위(都城衛)·도성경수소(都城警守所) 등이 있었다.(사전에서 옮김)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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