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역에서 바라본 백마고지의 나즈막한 능선. 평평한 동산처럼 보입니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한국철도 경원선이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더 이상은 달릴 수 없는 이곳 경원선 종착역 백마고지역입니다. 그동안 신틴리역까지 운행되었던 경원선이 지난해 11월부터 이곳 백마고지역까지 연장 운행되면서 백마고지 전투를 기억하는 많은 전쟁영웅들과 한국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백마고지전적지를 방문하여 백마고지를 바라보면서 비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백마고지역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많이 늘어난 듯합니다.
백마고지전적지(왼쪽의 푸른 능선)와 뒤로 보이는 백마고지. 현재 백마고지는 DMZ내에 있어 우리 군의 주요 시설로 일반인들의 출입은 불가한 지역.
바로 앞에 길게 늘어선 능선이 백마고지.
백마고지 전투 白馬高地戰鬪
백마고지는 6·25한국전쟁중 1952년 10월 6일 저녁부터 10월 15일 오전까지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에서 전개된 전투지역으로 심한 포격에 의해 하얀 바위 가루만 덮여 있어 멀리서 보면 흰말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간의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이었으며,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명에 국군 제51·52·53포병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3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의 승리의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를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다.(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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