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남한산성 수어장대

마 음 2013. 6. 2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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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숲속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야생화 범의꼬리.

 

 

 

 

 

 

서문.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 방향 남한산성 입구로 부터 남한산성을 오르면 서문(남한산성 서문(우익문)南漢山城 西門(右翼門) 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남한산성 서문(우익문)南漢山城 西門(右翼門) 의 성 안에서 본 모습.

 

 

 

 

 

 

 

 

 

남한산성의 성곽모습.

 

 

 

 

 

 

 

 

 

남한산성 성 안과 밖의 모습.

 

 

 

 

 

 

남한산성 성곽 모습 (성 안) 

 

 

 

 

 

 

수어장대 입구 350여 년의 수령을 자라앟는 향나무.

 

 

 

 

 

 

수어장대 내의 노송.

 

 

 

 

수어장대(서장대).

 

장대는 남한산성의 군사방어시설로 수어장대(守禦將臺)는 하층 정면 5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의 어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옮겼으며 용마루에는 조두를 옮겼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의 팔각 장주초석 위에 돌려져 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 악공 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조를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을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의 난간을 들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수어장대는 2층 누각이다. 2층의 내부 편액은 무망루 (無忘樓)라 하는데 1836년 유수 박지룡이 증축한 것이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 문을 달았으며, 판 문에는 태극 무늬를 그렸다. 천장 양식은 연등 천장을 하였다. 산성의 서족 주봉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주말이면 수만의 인파가 몰리고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산성내 최고봉인 일장성(해발495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수어장대 옆에 청량당이라는 사당이 있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방문기념으로 심었다는 전나무도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암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 북 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