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제69돌 현충일을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가 열렸다.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의 「평화의 시계탑」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의 「형제의 상」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복제비)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동쪽인 국강상에 있는 광개토왕릉 동쪽 편에 세워졌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 등 많은 고구려 유적이 있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으로 된 불규칙한 직사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 1.48m, 제2면 1.35m, 제3면 2m, 제4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불규칙한 직사각형이다. 문자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문자는 비의 4면에 모두 새겨져 총 44행 1,755자인데, 예서체에 가까운 서체를 사용하여 장중하고도 위엄이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지안 현 퉁거우)의 동쪽인 국강상(國岡上)에 있는 광개토왕릉 동쪽편에 세워졌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비가 있는 곳의 현재 지명은 압록강 북안(北岸)인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 퉁거우 진[通溝鎭] 타이왕 향[太王鄕] 타이왕춘[太王村]이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적이 산재해 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문자는 비의 4면에 모두 새겨져 총 44행 1,755자로, 이중 마멸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여 자에 이른다.
중국 학자 왕젠췬〔王健群〕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제1면은 11행 449자, 제2면은 10행 410자, 제3면은 14행 574자, 제4면은 9행 369자이다. 각 문자는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체에 가까운 서체를 사용하여 장중하고도 위엄이 있어 고구려 독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하다. 그리고 문자의 크기는 균등하지 않으나 대략 가로·세로가 14~15cm 안팎이며, 이체자(異體字)와 간체자(簡體字)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비문의 내용
비문은 그 내용에 의해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이다. 둘째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를 적은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특히 신묘년기사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는데, 연대에 따라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395)조는 비려(稗麗) 정벌에 관한 것이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이 비려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 거란[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황해도)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이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비문은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다음백과사전)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의 각종 전쟁무기 전시.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의 6.25 상징 조형물.
2024년 6월 6일. 제69돌 현충일을 맞이하여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호국영령들과 UN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시고 소중한 목숨을 바친 참전국의 젊은 영령들께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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