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세계

정몽주

마 음 2006. 8. 2. 10:23

 

 

 

합정동 로터리 소공원에 세워진 포은 정몽주선생 동상 

 

 

 

 

보물 제1110호로 지정된 포은 정몽주선생 영정

 

 

 

정몽주(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고려 말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영일정씨세보〉에 의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산직(散職)인 동정직(同正職)과 검교직(檢校職)을 지냈는데, 이는 그의 집안이 지방에 거주하는 한미한 사족이었음을 보여준다. 1360년(공민왕 9) 김득배(金得培)가 지공거, 한방신(韓邦信)이 동지공거인 문과에 응시,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첫자리를 차지해 제1인자로 뽑혔다.

 

1362년 예문검열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친원파인 김용(金鏞)의 계략에 빠져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함께 상주에서 효수당했는데 그는 스스로 김득배의 문생(門生)이라 하고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장사지내주었다. 1364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삼선(三善)·삼개(三介)를 쳤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 朱子集註〉뿐이었는데 정몽주는 그것을 유창하게 강론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뛰어났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많이 의심했다. 그뒤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을 얻어 참조해보니 그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탄복했다.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던 이색(李穡)은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했다. 1372년 서장관으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난징[南京]에 가 촉(蜀)을 평정한 데 대하여 축하하고 돌아올 때 풍랑을 만났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1375년(우왕 1)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임명되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전임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가 처음 건국되었을 때 그가 힘써 요청하여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인 일로 국내가 뒤숭숭하여 명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자, 사신을 보내 사정을 고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얼마 후 북원(北元)에서 사신이 오고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사신을 맞이하려 하자,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에 반대했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이당시 왜구가 자주 내침하여 피해가 심하므로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 화친을 도모했는데 나흥유는 투옥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이에 정몽주를 보빙사(報聘使)로 일본에 보내 해적을 금할 것을 교섭하게 하자 이웃나라 간의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이어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당시 명은 고려에 출병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으나,

 

정몽주는 사신으로 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5년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 1386년 명에 가 명의 갓과 의복을 요청하고 해마다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이를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했다. 1388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같은 해 도당(都堂)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鄭道傳)·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趙浚)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 법의 자의적 운영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고자 통일된 법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는데, 정몽주는 〈지정조격 至正條格〉·〈대명률 大明律〉, 그리고 고려의 고유형법을 수집·연구하여 왕에게 바쳤다. 또한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했다. 한편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거해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 제사지내도록 했으며,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 지방에 향교를 두어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하여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도통(道統) 중심의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때 도통의 기준을 주자학의 학문적 공적으로 한 공적론(功積論)과 의리명분으로 한 의리론(義理論)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주자학의 학문적 성숙이 심화되면서 후자를 대표하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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