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남산(목멱산) 봉수대(봉화대)

마 음 2008. 2. 22. 19:54
728x90

 

 

 

 

 

남산봉수대

 

어제 정월대보름이라고 하여 달맞이나 할까 하여 오후 늦게 남산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남대문에서 내려 지난 9일 방화로 불타버린 숭례문 옆을 지나 남산길로 올랐다. 불탄 숭례문을 보고 싶지 않아서 가까이 가지 않고 지나치며 남산으로 들어가서 김유신장군의 동상과 백범 김구선생 동상 앞을 지나면서 천천히 걸었다. 대기가 깨끗하지 않아서 별로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볼거리가 많아서 그런대로 위로를 삼았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서는 그분이 생전에 말씀하셨던 글들을 커다란 돌기둥에 새겨 놓았는데 읽을 수 있는 한도에서 하나 둘 읽어보면서 그분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발길을 따라 어느덧 남산의 정상에 도달해 보니 5시가 넘었다. 서쪽으로는 한강물이 저물어가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동서남북으로 크고 작은 서울의 빌딩들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는 게 내 마음을 더욱더 산란하게 만든다. 

남산봉수대지 南山烽燧臺址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
지정연월일 : 1993년 9월 20일
시 대 : 조선시대
규모·양식 : 237.27㎡, 연대 5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남산봉수대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木覓山) 봉수대터이다. 남산봉수대는 서울에 있다 하여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봉수제는 처음 중국에서는 25~27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毅宗) 3년(1149)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의 봉수는 그 시설상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서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 해륙․변경의 제 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된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이밖에 기간 선로상의 직봉 [直線烽燧]과 그 보조선상의 간봉[間線烽燧]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봉수는 중앙의 경우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수령과 병사(兵使)․수사(水使)․도절제사․순찰사 등의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이든지 약 12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거(不擧)․불통되거나 전달 소요시간이 너무 지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봉수대에서는 올리는 횃불의 수로 정세의 느리고 급함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兵船)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에 의해 전달이 불가능할 때 봉수대는 포성(砲聲, 信砲․發火 등)과 각성(角聲, 角吹)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남산의 경봉수에는 봉수군과 오장을 오원(五員)이라 하여 배치하는 외에, 금군(禁軍) 중에서 고액 녹봉자(祿俸者)를 봉수군장에 임명, 번갈아 근무하면서 변방으로부터 올라온 정보를 병조에 보고하게 했다. 경봉수는 정원 20명에 5개소의 봉수마다 4명씩 상․하양번(上下兩番)으로 나누었고, 봉수군은 출․퇴번(出退番)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다.
서울 남산에 있는 5개의 봉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에 종합 보고하는 종점이 되었다.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목멱산봉수대는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1봉으로부터 제5봉에 이르는 5개가 있었다. 제1봉은 함경도ㆍ강원도ㆍ경기도를 거쳐오는 봉수, 제2봉은 경상도ㆍ충청도ㆍ경기도를 거쳐오는 봉수, 제3봉은 평안도ㆍ황해도ㆍ경기도의 내륙을 거쳐오는 봉수, 제4봉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닷길과 경기도의 육로를 통해오는 봉수, 제5봉은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오는 봉수를 받았다.
목멱산봉수대는 한양으로 천도한 후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500여년간 존속되었다. 이 봉수대에는 15명이었던 봉수군을 세종 28년(1446)에 20명으로 늘려 상·하 2번(番)으로 나누어 소(所)마다 2명씩 근무하게 하였다.
남산봉수대 5개소의 현재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된 이 봉수대는 <청구도(靑邱圖)>등의 관련자료를 참조하여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서울시 문화재 홈페이지에서 옮긴글)

'자연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 장봉도 인어상 설화(說話)  (0) 2008.02.24
사랑의 열쇠 - 우리사랑 영원히 변치말자.  (0) 2008.02.22
소요산 자재암  (0) 2008.01.26
아기 소나무 한 그루  (0) 2008.01.25
사군자 四君子  (0) 2008.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