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남한산성

마 음 2008. 6. 22. 23:58

남한산성의 남문 모습입니다. 현판에는 남문이 아니고 지화문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남문에서 동문 사이의 성곽 모습들입니다.

 

 

 

 

 

 

 

 

 

 

아직은 보수가 안된 무너진 성곽 모습

 

 

 

 

 

 

 

 

동문 갔다가 남문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는 성 밖으로 나와서 보니 성이 든든하고 높게 쌓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나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는 동문의 모습입니다. 동문이라는 현판이 없어서 동문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동문에서 남문으로의 바깥 성곽.  

 

 

 

 

 

 

 

이 문은 동문 옆에 있는 시구문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현판을 보니 천주교인들이 죽임을 당해서 버려진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수어장대 옆의 무망루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남한산성 서문의 모습입니다.

 

 

 

 

 

 

남한산성의 서문에서 북문 사이의 성곽 모습들.

 

 

 

 

 

 

 

 

남한산성의 북문 모습입니다.

 

 

 

 

 

일요일이고 이른 아침에 비도 내리다가 그치고 하여 집에서 가까운 안산이나 둘러볼까 하다가 날씨가 점점 좋아지는 것을 보고는 12시가 가까워진 시각에 남한산성을 다녀올 마음을 정하고 전철을 3번씩이나 갈아타면서 남한산성역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성곽이 제일 잘 보존되고 있다는 남한산성을 일주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성곽만을 둘러보고 왔기 때문에 행궁이나 역사관은 관람을 못 하고 돌아왔습니다. 산성 입구에 도착해보니 "남한산성 유원지"라는 커다란 돌에 새겨진 표지석이 버티고 앉아 있는데 역사유적지를 유원지라고 하는 말이 왠지 저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더군요. 그냥 '남한산성 공원"이라는 말이 나을 듯하였습니다. 유원지와 공원의 의미는 다르니까요. 저만의 생각이겠지만요.

산성공원 초입에 세워진 돌탑들을 구경하면서 처음 만난 성문이 남문이었습니다. 남문에 도착하여 보니 중앙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 밖에서 보았을 때에 오른쪽으로 동문이 왼쪽으로 서문, 북문이 있어서 성곽을 모두 둘러보려고 마음을 먹고 왔는데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 같더군요. 동문부터 차례로 둘러보고 싶었는데요. 할 수 없이 동문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서문과 북문을 둘러보아야 하겠더라고요. 성안으로 난 길을 이용하여 부지런히 동문을 답사하고 다시 발길을 돌려 성 밖으로 올 수 있는 길은 성 밖으로 하여 남문까지 와서 서문과 수어장대와 북문을 거치면서 성곽답사를 하고 왔습니다. 지금도 한창 성곽보수공사가 진행 중에 있고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일부 구간에는 성곽이 많이 무너져내려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니 멀지 않아서 온전한 남한산성을 보게 되겠지요.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 북 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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