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수원 화성 창룡문 - 동문

마 음 2010. 3. 19. 11:55

 

동문 성 밖의 모습. 

 

동문 성 안의 모습.

  

 

파노라마 모습.

 

 

 

봉수대.

 

 

동남각루 안과 밖. 이 누각을 끝으로 수원시가지로 인하여 성이 끊기고 지동시장이 이어진다.

 

 

창룡문-동문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동문으로서, 유좌(酉坐)묘향(卯向)으로 앉았다. 장안문(長安門)이나 팔달문(八達門)과 비교하여 문의 규모도 작고, 형태도 간략하다. 특히 석축 위 누각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격식 또한 낮다. 여장 안에 있는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기둥 위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간단한 첨차가 2중으로 놓인 이익공(二翼工) 으로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수문청(水門廳)은 3칸으로, 문안 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창룡문의 경우 주변 지형이 평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에 적대를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을 세웠다. 또 동문 바로 옆에는 쇠뇌를 쏠 수 있는 동북노대(東北弩臺)를 두어 멀리 팔달산 정상의 서노대(西弩臺)와 마주 대하도록 했다. 창룡문의 특징은 옹성의 출입문이 장안문(長安門)이나 팔달문(八達門)과 달리 한쪽 구석에 나 있는 것이다. 일반 읍성의 경우 북쪽에 관청이 자리해서 동서 방향으로 길이 나기 때문에 동문, 서문이 주 통행문이 되었다. 그러나 화성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주 통행로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문과 서문으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것이다. 본래 화성의 동쪽으로 용인으로 통하는 큰길이 나 있었지만, 남문 주변에 가게가 늘어서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용인으로 가는 사람들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창룡문을 이용하지 않고 팔달문을 지나다닌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일반 읍성에서 사람들이 동문과 서문을 주로 이용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했으며, 안 쪽은 높이가 16척(약4.84m) 너비가 14척(약4.24m),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약4.54m) 너비가 12척(약3.63m), 전체 두께는 30척(약9.09m)이다. 안 쪽 좌우의 무사(武砂)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약9.09m) 높이 18척 5촌(약5.6m)이며, 좌우의 와장대는 길이가 각각 20척(약6.06m)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약2.72m)이다. 바깥 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약5.45m)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약5.15m), 양쪽 대문은 철엽(鐵葉)으로 싸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타구가 6개 있고, 방은 총혈(銃穴)도 6개가 있다. 옹성(甕城)과 성문의 좌측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문은 설치하지 않았다. 형태상으로 서울의 흥인지문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옹성 안쪽에 벽돌 누조(漏槽) 4개를 설치했으며, 바깥쪽에 현안 3개를 뚫어 놓았다. 여기에 여장(女墻) 4첩을 설치하고, 원근 총안 14개를 설치하였다. 옹성의 뒤에는 회다짐을 하였고, 그 남쪽 가장자리에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元城)에 통하게 되어 있다. 창룡문의 공사비는 1만 3335냥 7전 3푼이 소요되었고, 편액(偏額)은 판중추부사 유언호(兪彦鎬, 1730-1796)가 썼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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