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안에서의 북문.
성 밖의 장안문 모습.
포루에서 본 북문의 위용.
성문옆에는 포루가 설치되어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포루.
장안문-북문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역할을 하는 북문 장안문(長安門)은 또한 한양에서 출발한 임금을 맞이하는 정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안문은 행궁의 왼쪽 편 동쪽에 사좌(巳座)해향(亥向)으로 자리했다. 높은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의 누각은 중층(重層)으로 하고 있다. 누각은 상하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기둥 위에는 다포식(多包式)의 화려한 공포를 짜서 건물의 위용을 더했다. 지붕은 추녀선이 지붕 꼭대기에서 처마 끝까지 길게 내려오는 우진각 지붕이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취두와 잡상을 올려 멀리서도 특별한 격식을 지닌 건물임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성외에는 옹성(甕城)을 반원형으로 둘렀다. 이 둥근 벽체는 벽돌로 축조되었는데, 돌로 쌓은 좌우의 성벽과 대조를 이룬다. 장안문의 좌우에는 적대가 하나씩 있는데, 북성적대(北城敵臺)이다. 이것은 높은 위치 가장자리에서 적을 좌우로 살피면서 공격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문의 위용을 더욱 높이는 역할들을 하였으며 현안을 3곳 설치하였다. 윗 부분에 여장을 두르고, 3면에는 11첩이 있고, 총안을 뚫어 놓았다. 장안문의 특징은 옹성의 출입문이 중앙에 나 있는 것이다. 보통 옹성의 출입문은 한쪽 모퉁이에 두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한가운데 출입문을 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八達門)의 옹성 중앙에 출입문을 둔 것은 사방으로 열리고 뚫린다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만큼 화성에서는 유사시의 방어뿐 아니라, 평상시 사람이나 물자의 원활한 유통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실학자 정약용의 건의로 옹성 출입문 위에는 누조(漏槽)라고 하는 큰 물통을 만들고 여기에 물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구멍 다섯 개를 내고 이름을 오성지(五星池)라 하였다. 이것은 적이 성문을 불질러 파괴하려고 하는 공격에 대비, 이 구멍으로 물을 부어 성문을 보호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며, 다른 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설물이다. 홍예로 되어 있는 문의 안과 밖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약5.85m) 너비 18척(약5.55m) 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약5.3m), 너비 16척(약4.84m), 전체 두께는 40척(약12.11m)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약20.53m), 높이가 23척 5촌(약7.11m),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약12.64m) 높이가 22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6.47m),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는 곳에 타구는 10 개(첩(堞)은 11개)를 벌여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女墻)은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고, 장(墻)에 세운 2층의 누는 전체 높이가 32척 9촌(약10.14m)이다. 아래층의 안은 7포 바깥은 5포로 정면 칸의 너비는 22척 5촌(약6.93m)인데, 바닥에는 널빤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한 칸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약3.7m)이며, 세로 2칸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약7.4m)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칸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칸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 [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는 연다.] 위층은 안팎 모두 7포로 정면의 칸과 좌우 제 1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약2.77m)이며, 그 세로가 2칸 전체 길이는 18척(약5.55m)인데 모두 널빤지를 깔고,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았다. 장안문의 공사비는 화성의 부대 시설 중 가장 많은 5만 8090냥 8전이 소요되었으며, 문루의 편액(偏額)은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 1795~1799)이 썼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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