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수원 화성 행궁

마 음 2010. 3. 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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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원래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 華山 >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가 동왕< 同王 > 13년(1789) 그의 생부< 生父 >인 장헌세자< 莊獻世子 >(속칭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원침< 園寢 >인 현륭원< 顯隆園 >(후에 융릉< 隆陵 >으로 추증함)을 양주< 楊州 > 배봉산< 拜峰山 >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 邑治 >와 민가< 民家 >들을 수원 팔달산< 八達山 >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 正祖 >는 부왕< 父王 >인 장조< 莊祖 >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 華城遷都 >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 築城工事 >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하였다. 이 화성은 실학자< 實學者 >로 불리는 유형원< 柳馨遠 >과 정약용< 丁若鏞 >의 성설< 城說 >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 蔡濟恭 >이 성역< 城役 >을 주관하고 조심태< 趙心泰 >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 構造物 >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 石材 >와 전< 塼 >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 銃砲 >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 用材 >를 규격화하여 거중기< 擧重機 >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이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蒼龍門 >, 서쪽으로 화서문 < 華西門 >, 남쪽으로 팔달문 < 八達門 >, 북쪽으로 장안문< 長安門 > 등 4대문을 내고 암문< 暗門 > 4개, 수문< 水門 > 2개, 적대< 敵臺 > 4개, 공심돈< 空心墩 > 3개, 봉돈< 烽墩 > 1개, 포루< 砲樓 > 5개, 장대< 將臺 > 2개, 각루< 角樓 > 4개, 포루< 포樓 >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 行宮 >을 지어 현륭원< 顯隆園 >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 門樓 >가 파손되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 復元 >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서남루까지의 450m 구간과 방대한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하였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사도세자

노론(老論)의 일당전제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모략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사도세자사건).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0세 때 혼인했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1743년(영조 19) 관례(冠禮)를 행하고 나서 부왕이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1749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영조와 세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대립관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1752년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한 뒤부터였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이것이 영조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숙의 문씨(淑儀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병이 발작했다. 혜경궁 홍씨〈한중록 恨中錄〉에 따르면 이때 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한다. 1762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지적한 10조목의 상소를 했다. 영조는 크게 노해 세자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의하여 표면상으로는 당쟁이 주춤한 듯했지만 사실상 노론·소론 간의 대립은 심각한 상태였다. 즉위과정에서 노론의 지지를 받았던 영조는 즉위 후 계속 노론에게 제약되고 있었다. 결국 세자의 노론의 전횡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영조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노론·소론·남인이 얽힌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분쟁을 파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죽은 뒤 바로 사도(思悼)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 1899년(광무 3)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능은 수원에 있는 융릉(隆陵)이다.

(백과사전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