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대동보서(己未大同譜序)
양(洋)의 동서(東西)와 육(陸)의 신구(新舊)를 불문(不問)하고 인류생활(人類生活)의 시원(始源)을 표상(表象)하는 창세(創世)의 설화(說話)나 개국(開國)의 기록등(記錄等)은 한결같이 천수(天授)의 권능(權能)을 갖춘 초인적신웅(超人的神雄)을 기조(起祖)로 하여 연면(連綿)하는 혈통(血統)을 후세(後世)에 이어 내려온 사적(史跡)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비교적(比較的) 개인주의(個人主義)와 독립개척(獨立開拓)의 생활철리(生活哲理)를 지키고 있는 서구(西歐)사람들마져도 그 선조(先 祖)의 현명(顯名)과 공업(功業)을 자랑하기를 즐기고 있으며, 하나의 평범(平凡)한 시민(市民)들까지도 그들 선조(先祖)의 하명(下名)에 2세(二世) 3세(三世)를 부미(附尾)하여 칭명(稱名)하고 있는 사례(事例)를 볼때 이들이 얼마나 전통(傳統)과 가문(家門)을 중시(重視)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거늘 하물며 오래전(前)부터 가부장제도적(家父長制度的) 집단사회(集團社會)에 살면서 문범(文範)으로써 그 가계(家系)를 밝히고 효의(孝義)로써 그 부조(父組)를 존숭(尊崇)하며 신애(信愛)로써 그 구족(九族)과 돈목(敦睦)하는 것을 인도(人道)의 강상(綱常)으로 산아온 우리 동양(東洋)사람이 수보사업(修譜事業)에 주력(注力)한 것은 지극(至極)히 당연(當然)하고 그 중(中)에서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세계(世界)에서 가장 체계(體系)있게 편간(編刊)된 족보(族譜)를 보유(保有)하고 있음은 유학(儒學)을 근간(根幹)으로 하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일면(一面)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양문(梁門)은 단군(檀君)과 병립(並立)하여 탐라국(耽羅國) 즉 오늘의 제주도(濟州道)에 국가(國家)를 창업(創業)하신 삼신인(三神人)의 수장(首 長) 양을나성왕(良乙那聖王)의 후예(後裔)로써 그 장구(長久)한 역년(歷年)에 있어서 이나라 최고(最古)의 성씨(姓氏)에 속(屬)할뿐 아니라 문현무달(文 顯武達)로써 수십세기(數 十世紀)에 걸쳐 이 땅에 위훈(偉 勳 )을 세워온 망족(望族)인지라 모선유후(慕先遺後)의 수보사업(修譜社業) 또한 일찍부터 창안발전(創案發展)되어 왔는데 그 중(中)에서도 성화임인보(成化壬寅譜 즉 거금사백구십칠년(距今四百九十七年) 이전(以前)인 서기(西紀)1482년(이조(李朝) 성종(成宗)13년)에 이루어진 문양공수필보(文襄公手筆譜)의 편제(編製)는 특기(特記)할만한 사실(事實)이다.
전기임인보(前記壬寅譜)를 기점(起點)으로 1587년 정해(丁亥)에 제주(濟州) 남원양관(南原兩貫 )의 합보(合譜)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1688년 병인(丙 寅)에 다시 제남합보(濟南合譜) 1746년 병인(丙寅)에 제병용대충(濟兵龍帶忠)의 대동보(大同譜) 1748년 무진(茂辰)에 또 제남합보(制南合譜)가 있었다. 이어 1750년 경오(庚午)와 1755년 을해(乙亥) 그리고 1791년 신해(辛 亥)에 병부공파(兵部公派)의 4차파보(四次派譜) 1853년 계축(癸丑)의 용성군파보(龍城君派譜)1875년 을해(乙亥)의 제주양씨보(濟州梁氏譜)가 간행(刊 行)되었고 그 후(後)에도 끊임없이 각파(各 派)에서 편간(編刊)한 족보(族譜)만도 30여회에 달(達하)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들 구보(舊 譜)를 열람(閱覽)할 때 그 체재(軆裁)와 내용(內容)에 보완(補完)을 요(要)하는 부분(部分)이 불무(不無)하고 누차(累次)에 걸친 제남합보(濟南合譜)는 목족(睦族)의 대의(大義)를 친밀(親密)히 한 점(點)에서는 공헌(貢獻)함이 지대(至大)하였으나 문자(文字)그대로 합보(合譜)로서 상호연계(相互聯繫)가 미흡(未洽)하고 아직 수단(收單)에 있어서도 철저(撤底)를 기(期)하지 못한 감(感)이 있었으니 아마 당시(當時)에는 교통수단(交通手段)의 불편(不便)등 많은 장애(障礙)가 있었음이 상상(想像)된다.
편보(編譜)의 완벽(完壁)을 기(期)하는 시도(試圖)의 일환(一環)으로 하거헌수공(荷居憲洙公)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갔던 귀로(歸路)에 능주(綾州)의 관제종장(寬濟宗長)들을 찾아 제남대동보(濟南大同譜)의 간행(刊 行)을 제론(提論)함과 동시(同時)에 우선(于先) 항렬(行列)이라도 통일(統一)해 보자하여 합의(合議)한지도 벌써 백년(百 年)이 넘었다. 이로 볼때 전국(全 國 )의 종인(宗人)을 빠짐없이 동일보책(同一譜冊)에 수록(收錄)하지는 것이 선인(先 人)들의 얼마나 큰 숙원(宿願)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우리 종친회(宗親會)는 1956년 4월 숭조친목(崇祖親睦)과 양문(梁門)의 번영(繁榮)을 목적(目的)으로 설립(設立)된 후(後) 초대(初代)에 전대법관(前大法官) 대경회장(大卿會長) 2대에 전중추원참의(前中樞院參議) 재창회장(在昶會長)의 지도(指導)와 노력(努力)에 힘입어 그 기반(基盤)이 확립(確立)되었고 축년회세(逐年會勢)의 신장(伸張)과 전국적(全國的)인 조직확산(組織擴散)을 이룩하여 1976년 춘계총회(春季總會)에서는 “숭선(崇先) 애족(愛族) 유후(裕後)”의 종헌(宗憲)을 제정(制定)하고 숭선사업(崇先事業)으로는 역대명조(歷代名祖)의 유덕(遺德)을 현양(顯楊)하는 각종문헌출판(各種文獻出版) 서원건립사우부설(書院建立祠宇復設) 유적보수(遺蹟補修)등을 전국적으로 실시(實施)하고 애족운동(愛族運動)으로는 종친회보(宗親會報)인 계간(季刊) “양씨춘추(梁氏春秋)”紙 발간(發刊)을 비롯하여 지방종친회(地方宗親會)의 활동강화(活動强化 각파(各派) 명조유허(名組遺墟)의 합동순례(合同巡禮) 등 행사(行事)에 가일층(加一層) 힘썼으며 유후(裕後) 육영(育英)을 위(爲)하여는 흥량장학회(興良獎學會) 기금(基金)을 조성(造成)하여 경향(京鄕)의 유망(有望)한 학생(學生)들을 지원육성(支援育成)하고 있으니 이는 양문(梁門)의 번영(繁榮)을 위(爲)한 일대성사(一 大盛社)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활기(活찬氣 ) 종회조직(宗會組織)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차제(此際)에 선인(先人)들께서 유의미수(有意未遂)한 전국양씨(全 國梁氏)의 대동보)大同譜)를 편간(編刊)함으로써 선인(先人)들의 숙원(宿願)을 달성(達成)하고 내일(來日)의 발전(發展)을 기(期)하자는 결의(決議)가 지난 1973년 조춘(早 春)에 종친회이사회(宗親會理事會)에서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가결(可決)되고 종친회장(宗親會長)이 대동보편찬위원장(大同譜編纂委員長)을 겸(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원래(元來) 이 사업(事業)이 각파간(各派間)의 특수사정(特殊事情)과 졸급(猝急)히 개폐(改廢)하기 어려운 인습(因襲)등도 있는지라 시일(時日)의 천연(遷延)을 불가피(不可避)하게 하였고 더구나 출판부진(出版不振)등 요인(要因)도 병존(倂存)하여 실(實)로 발의착수후7년(發議着手後七年)이 경과(經過)한 금일(今日)에 이르러 보책(譜冊)을 반포(頒布)하게 되었다.
그간 보소(譜所)에서는 가능(可能)한 한(限) 전종인(全宗人)의 수록(收錄)을 목표(目標)로 하여 신문지상(新聞紙上)의 보도(報導)와 주민등록(住民登錄)에 의(依)한 조사(調査) 그리고 현지출장(現地出張)등의 방법(方法)을 다하고 또 구보(舊譜)의 미비점(未備點)을 고증(考證) 보정(補訂)하는데 힘썼으며, 보첩편집(譜牒編輯)의 세목(細目)및 준칙(準則)에 관(關)한 사항(事項)은 규례(規例)에 기록(記錄)한 바와 같이 세심(細心)한 주의(注意)를 잊지 않았다.
끝으로 첨언(添言)할 것은 이 수년(數年)동안에 사사(私事)를 희생(犧牲)하여 가면서 보사(譜事)에 심혈(心血)을 경주(傾注)하여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게한 각파대표본부임원(各派代表本部任員)및 지방임원제위(地方任員諸位)께 심심(深甚)한 경의(敬意)를 표(表)하며 또한 사재(私財)를 희사(喜捨)하여 이 역사적(歷史的) 거업(巨業)에 찬조(贊助)한 독지종장(篤志宗長)에게도 만강(滿腔)의 사의(謝意)를 드리는 동시(同時)에 비록 미흡(未洽)하나마 이 대동보간행사업(大同譜刊行事業)이 위로는 선조(先祖)의 유덕(遺德)에 답(答)하고 아래로는 후세(後世)의 번영(繁榮)을 기(期)하는데 일조(一助)가 되기를 기원(祈願)하면서 그간(間)의 전말(顚末)을 기록(記錄)하여 서(序)에 가름하는 바이다.
西紀一九七九年 己未九月 日(서기1979년 기미구월 일)
기미대동보(己未大同譜) (1979년 제작)
종사편 (宗史篇) 2권
한라군파(漢拏君派) 2권
성주공파(星主公派) 2권
병부공파(兵部公派) 8권
용성군파(龍城君派) 4권
대방군파(帶方君派) 1권
예성군파(蘂城君派) 일부
기미대동보 병부공파 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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