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세계

서울역 광장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마 음 2018. 10. 8. 23:02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에서 회현동으로 이어지는 고가차도로 이용되던 서울역고가차도가 노후화되어 차량통행용으로는 붕괴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안전상의 이유로 차량통행을 막고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사람만 통행하는 고가인도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름이 「서울로 7017」이다. 서울로 7017에는 대형 화분에 여려가지 식물을 심어 이용자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 산촌귀향 중에 잠시 들러보는데 장미 향기가 가득하다. 예전에 들렀을 때는 보이지 않던 피아노가 여러 대 놓여 있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이용자라면 멋진 피아노 연주도 할 수 있겠다. 구서울역 광장에는 독립투사 왈우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고. 하지만 서울역 광장 여기저기에는 노숙자들의 노숙 잠자리 용구가 쓰레기처럼 널려있고 일부 종교단체의 포교행위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왈우 강우규 의사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서라고 합니다.


강우규 의사는 1859년 6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디.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영덕리로 이주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셨고,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셨다. 그 후 1915년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으로 이주,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의식 고취와 기독교 전도사업을 통한 민족개몽운동을 펼치셨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료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의 요하현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셨다.


강우규 의사는 1919년 8월 5일 폭탄을 품은 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에 도착 1919년 9월 2일, 남대문(서울역) 정거장에서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성을 세계만방에 폭로하여 한국민의 자주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