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산 아래 공민왕 사당.
절두산 순교 성지
1. 양화진(楊花津). 잠두봉(蠶頭峰)의 유래와 역사
양화진은 순수한 우리말로 풀이하면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란 뜻이다. 그리고 우뚝 솟은 잠두봉은 생김새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불렸던 이름이다. 양화나루 잠두봉은 15세기 태종 때부터 17세기 인조 때까지 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었을 분만 아니라 국내의 고관 사대부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던 이름난 명승지였다.
또한 지리적으로는 서울에서 양천 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이자 삼남지방의 조운선(漕運船)과 한강 유역의 각종 어선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양화나루는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물품들을 조사하고 도적(盜賊)들을 단속하던 장소가 되었으며, 구한말(舊韓末)에는 청(淸) 일(日)과 서구열강(西歐列强)에 의해 통상 개시장(開市場)으로 지목되면서 교통 상업 무역의 요충지가 되기도 하였다.
2. 병인양요와 절두산순교성지
병인양요(丙寅洋擾)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 해안과 한강을 탐사하고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다가 패퇴한 사건으로 위정자들에게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866년 10월 이전까지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이루어지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갑자기 양화진으로 변경된 이유는 이 병인양요 때문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왔고 강화도에 원정할 수 있도록 천주교 신자들이 도왔으므로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듬해까지 양화진 잠두봉에서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이때부터 이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의 머릭 ㅏ잘린 봉우리'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3. 절두산의 병인박해 순교자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와 교류한 일이 있거나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와의 관련 혐의가 있는 신자들이었다. 그들이 포도청의 문초 때 여기에 연관되어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추궁받은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절두산 최초의 순교자 이의숑(프랑치스코)도 포도청에서의 문초 때 이러한 추궁을 받고 "서양 선박이 조선에 올 것이라는이야기는 1865년 12월에 베르뇌 주교에게서 들었다."라고 진술하였다. 실제로 이의숑. 김이쁜(마리아) 부부와 아들 이봉익(베드로)은 천주교 신자로 서양세력을 불러들였다는 죄목 아래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또한 강 요한은 체포될 당시에 선교사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중죄인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교회 순교록을 통해 추정되는 병인박해 당시의 절두산 순교자 수는 200명 내외이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수는 29명이다.
대한민국 해군에서 30년의 임무를 마치고 퇴역하여 한강공원에 안보교육용으로 전시한 서울함의 위용.
서울함(FFK-952)
등급 : 울산급 호위함.
배수량 : 1,900t
전장 : 102m
전폭 : 11.5m
높이 : 28m
최대속력 : 36kt(67km/h)
취역 : 1985년
퇴역 : 2015년
승선인원 : 150명
레이더 : 대공레이더. 대함레이더. 추적레이더
무장 : 하푼 대함미사일 8기. 76mm 함포 2문. 30mm 쌍열포 4문. 어뢰 6발. 폭뢰 12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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