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세계

레오나르도다빈치

마 음 2006. 10. 17. 11:04


그리스도의 세례

 

 


 

레다

 

 


 

모나리자

 

 


 

성안나와 성모자와 어린양

 

 


 

여인

 

 


 

젖먹이는 성모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 피렌체 공화국 빈치~1519. 5. 2 프랑스 클루.
생애와 작품
■ 피렌체에서 보낸 초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초크로 ...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엠폴리 근처의 빈치에 있는 부친의 가족 소유지에서 1452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젊은 시골 여인으로, 출산 후 곧 그 지역 출신의 공예가와 결혼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적자 대우를 받으며 그당시의 초등교육에 속했던 읽기·쓰기·산수를 배우며 자랐다. 정통 학문의 주요 언어였던 라틴어는 훨씬 나중에야 본격적으로 공부했으며 30세가 되자 비록 초보단계에 머물렀지만 고급 기하학과 수학이론에 전념했다.

15세 때 레오나르도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도제가 되어 그의 공방에서 회화와 조각 및 여러 가지 회화 기법 등 다방면의 훈련을 받았고, 이웃해 있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공방에서도 일하면서 처음으로 해부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472년에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화가 길드에 받아들여졌으나 5년을 더 스승의 공방에 머물렀다. 그의 뛰어난 회화적 기량은 베로키오가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와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제작된 2점의 〈수태고지 Annunciation〉(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에 그가 그린 천사와 풍경에서 부분적으로 이미 드러나며, 그의 초기작 〈카네이션을 든 성모 Madonna with the Carnation〉·〈브누아의 성모 Madonna Benois〉·〈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Portrait of Ginevra de' Benci〉에서도 나타난다. 이같은 재능은 미완성으로 남은 2점의 그림 〈성 히에로니무스 St. Jerome〉와 〈동방박사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Magi〉에서 절정을 이룬다.
 
■ 천재성의 발현, 첫번째 밀라노 시절(1482~99)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게 되어 피렌체를 떠났다. 그가 피렌체를 떠난 이유는 메디치가(家)가 통치하던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 풍조가 경험지향적인 그의 정신과 상반되고 좀더 현실적이고 학구적인 밀라노의 분위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화려한 대저택과 그곳에서 맡게 된 일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밀라노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대공의 전속 화가이자 토목기사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조각가로 또 궁정 연회의 기획자로서 활동했다. 또한 토목 건축 및 군사 문제의 기술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수력과 기계에 관한 공학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지낸 17년간 단지 6점의 회화작품만을 남겼다.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Lady with an Ermine〉을 비롯해 〈악사 Musician〉, 제단화로 그린 2점의 〈암굴의 성모 The Virgin of the Rocks〉,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린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 Supper〉(1495~97), 밀라노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에 있는 살라 델레 아세의 천장을 장식한 그림(1498)이 그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초청된 진짜 이유로 추측되는 대규모의 조각기획은 스포르차 가문을 세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해 거대한 청동기마상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중도에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으나 이 일에 12년을 바쳤고 이것을 위한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그중 가장 인상깊은 것은 20세기 중엽에야 마드리드에서 발견된 레오나르도의 노트 2권인데, 이를 통해 그의 구상이 얼마나 장엄하고 비현실적이리만치 대담한가를 알 수 있다. 1493년에 막시밀리안 황제가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할 때에 말의 점토원형이 공개되었는데, 높이가 5m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박한 전쟁의 위험 때문에 주조용 금속이 대포를 만드는 데 대신 사용되어 그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고, 루도비코가 1499년 권좌에서 내려옴으로써 15세기의 가장 큰 기념비적 사업이던 이 기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또 점토원형은 전쟁의 참화로 파괴되고 말았다.
거장이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커다란 공방을 가지고 견습공들과 제자들을 키웠다. 그들의 활동은 레오나르도의 위작 여부에 관한 논란을 초래했는데, 〈이마에 아름다운 장식을 두른 여인 La Belle Ferronnière〉(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루크레치아 크리벨리 Lucrezia Crivelli〉(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소장)·〈리타의 성모 Madonna Litta〉(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슈 미술관 소장) 등을 비롯한 작품들의 제작에 그들이 참여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레오나르도의 제자 가운데는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 베르나르디노 데 콘티, 프란체스코 나폴레라노, 안드레아 솔라리, 마르코 도조노, 살라이 등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해둘 필요를 느꼈다. 이는 당시에 나왔거나 구해볼 수 있었던 몇몇 예술 논문들에서 자극받은 것이기도 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이 1485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의 〈건축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Architecture〉은 필사본으로 나왔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사본을 저자에게서 직접 선물받았다. 또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쓴 〈회화에서의 원근법에 관하여 De prospectiva pingendi〉는 원근법이론에 관한 모범서가 되었다. 레오나르도와 아는 사이였던 수학자 루카스 파치올리는 1494년 〈산술집성 Su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 ità〉 이어 〈신성한 비례 Divina proportione〉를 출판했는데, 거기에 레오나르도는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삽화로 그려넣었다.
이런 환경에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예술이론을 글로 옮기고 싶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으며, '회화학'(science of painting)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떠올렸다.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원근법과 비례법에 대한 그들의 분석에서 이미 회화의 수학적인 토대를 입증하여 학문으로서의 회화 개념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주장은 훨씬 더 진전된 것으로서 '보는 것'과 '인지하는 것'을 동일시하여 대담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화가는 관찰을 통해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다시 확실하게 그림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질을 부여받은 최고의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1490~95년 레오나르도의 거대한 집필계획은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그의 필생의 중요한 4가지 주제가 포함되었는데, 회화에 관한 논문, 건축에 관한 논문, 기계학의 원리에 관한 글, 인체 해부에 관한 개요가 그것이다. 그밖에도 지구물리학·식물학·수리학·기상학에 관한 연구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레오나르도가 어렴풋이 생각해낸 '눈에 보이는 우주론'(visible cosmology)의 일부를 이룬다. 그는 관념적인 지식을 경멸하고, 체험에서 직접 보고 터득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받아들여 기록했다. 이 모든 연구와 스케치는 수천 장에 이르는 노트와 낱장의 종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어떤 화가가 남긴 것보다도 분량이 가장 많은 문학적 유산으로 옛 문헌에 언급된 40편 남짓한 사본들 가운데 21편이 남아 있으며, 이중에는 원래 분리되어 있던 것이 합본된 노트와 함께 모두 31편이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처음 이러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낱장의 종이나 허리띠에 찬 조그만 스케치북에 관찰한 것들을 재빨리 스케치한 뒤 그것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순서대로 노트에 끼웠다. 이 당시에 작성한 노트 가운데에는 회화론을 위한 첫 자료집(MSS. A와 B, 파리 프랑스 학술원 소장), 종교적인 건축과 범속한 건축의 전형적인 스케치 모음집(MS. B, 파리 프랑스 학술원 소장), 기계학 기초이론서(MS. 8937,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소장), 인체에 관한 논문의 첫번째 부분(해부학 MS. B, 윈저 성의 왕실도서관 소장)이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특히 거울에 비치는 상(像)처럼 글씨를 뒤집어 쓴 것과 글자와 그림의 관계에 있어서 독특하다. 왼손잡이던 레오나르도가 글씨를 반대로 쓴 것은 그로서는 쉽고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것은 은밀하게 남기려는 필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글은 거울에 비춰보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때때로 그가 정상적인 필법으로 글을 쓴 예로 보아(제3자에게 건네줄 편지나 메모 또는 논평의 초안들), 그는 정상적인 필법으로 글을 쓰는 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모 가운데 대부분이 거울에 비친 상처럼 씌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글로 쓴 독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결국 이 글들은 출판을 위한 예비단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노트의 또다른 특색은 도해와 본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다. 레오나르도는 명확하고 표현이 풍부한 말을 쓰는 데 열심이었으나, 교수법에서는 글보다 도해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했다. 그는 스스로 '실물교수'(dimo-strazione)라 부른 실물묘사법에서 현대 과학적 도해의 선구자였다.
이렇게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의 2가지 '활동영역'이던 예술과 과학은 훗날 그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 그것은 서로의 영역을 고무시키고 또 자극하는 일종의 '창조적 이원론'이었다.
■ 2번째 피렌체 시절(1500~06)
프랑스인들이 밀라노에 입성한 지 3개월 후인 1499년 12월에서 늦어도 1500년 1월 사이에 레오나르도는 루카스 파치올리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 맨 처음 만토바에 머물렀고, 그를 맞아들인 마르키오네스 이사벨라 에스테의 초상화를 그곳에서 1500년 2월 그렸다. 그후 3월에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 의회로부터 위협적인 터키의 프리올리 침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의뢰받고 위협을 받는 지역에 물이 범람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베네치아에서 오랫만에 피렌체로 귀향하자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를 맞았으며 명망높은 동향인으로 존경했다. 바로 그해에 그는 산프란체스코 알몬테 교회의 기반과 골조의 손상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건축전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산타아눈치아타 수도원에서 세르비테 수도회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성모자와 성 안나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1501년에 〈실타래를 든 성모 Madonna with the Yarn-Winder〉를 그렸는데, 현재는 모작만이 남아 있고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듬해(1502) 여름 그가 피렌체를 떠나 '군사 건축 및 기술 전반 고문'으로 체사레 보르자를 위해 일하기로 한 것은 오직 그의 무한한 '삶에 대한 욕구'로 볼 수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악명높은 아들인 보르자는 교황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교황령의 영토를 무모하게 많이 확장하려 했다. 당시 27세였던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위압적이고 가공할 만한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2배나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개성에 끌렸을 것이다. 그 밑에서 일하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현대 지도작성법의 기초를 닦은 도시계획도와 지형도 여러 점을 남겼다. 체사레 보르자의 대저택에서 레오나르도는 당시 피렌체의 정치고문으로 잠시 그곳에 머물고 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만나기도 했다.
1503년 봄에 그는 피렌체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피사가 바다를 접하지 못하도록 그 도시 뒤로 흐르는 아르노 강의 물줄기를 돌리려는 계획안의 전문위원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13세기에 처음 구상되었던 이 계획은 배가 다닐 수 없는 아르노 강의 지류를 피해 피렌체에서 물길을 따라 바다와 연결되는 거대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계획을 위해 예술적으로 뛰어난 풍경 스케치이기도 한 강둑의 개관도를 그렸으며 그 지형을 정확히 측정하여 뱃길이 나타나 있는 지도를 만들었다. 그 계획은 몇 세기에 걸쳐 고려되었으나 결코 실현되지 못하다가 수세기가 지난 후 그가 지도에 그린 뱃길을 그대로 따라 피렌체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같은 해(1503)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베키오 궁에 있는 '500 홀'에 벽화를 그리는 엄청난 주문을 받았다. 그것은 가로 17m에 세로 7m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역사적 장면으로 〈최후의 만찬〉보다 2배나 더 컸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이 〈앙기아리 전투 Battle of Anghiari〉에 매달렸는데, 훗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그린 〈카시나 전투 Battle of Cascina〉와 같이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무렵 〈모나 리자 Mona Lisa〉와 서 있는 〈레다 Leda〉도 그렸는데, 〈레다〉는 미완성인 채 모작들로만 남아 있다. 피렌체에 머문 이 시기는 집중적인 과학 연구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인체를 해부했으며, 그 실험을 신체기관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폭넓은 연구로 발전시켰다. 또한 새들의 비행을 조직적으로 관찰했고, '물의 성질과 움직임'에 대한 그의 수리학적인 연구는 물의 물리적인 특성, 특히 기류법칙과 비교연구한 수류법칙에 관한 연구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 2번째 밀라노 시절(1506~13)
프랑스 왕이 파견한 밀라노의 통치자 샤를 당부아즈가 1506년 5월에 피렌체 의회로부터 허락을 얻어 그는 잠시 밀라노로 가게 되나, 애초에 한정된 체류기간은 양국간의 정치적 긴장 상황 때문에 영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대작 〈앙기아리 전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물감에 대한 기법적인 실험에 실패하자 이 대작을 중단한 것 같다. 그는 1507~08년의 겨울을 피렌체에서 지낸 것 외에는 밀라노에서 6년간 머물렀다. 그의 후원자인 샤를 당부아즈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으며, 연봉 400다카트 받고 일했는데 그 일이란 고작 건축일에 관한 조언이었다. 밀라노에서 그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그는 피렌체에서 가져온 〈성모자와 성 안나〉와 〈레다〉를 계속 그렸다. 그리고 주변에 다시 제자들을 불러들였는데, 옛 제자인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함께 〈암굴의 성모〉 2번째 판(1508)을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옛 제자들 가운데 베르나르디노 데 콘티와 살라이가 다시 왔고, 새로운 학생으로는 체사레 다 세스토, 잠페트리노, 베르나르디노 루이니 및 젊은 귀족 프란체스코 멜치가 들어왔다. 멜치는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까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이무렵 레오나르도는 조각을 해달라는 중요한 청탁을 받았다.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적수로 밀라노에 온 프랑스 군대의 원수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가 그에게 자신의 묘를 조각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이 기념 조각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준비작업을 한 결과 중요한 스케치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트리불치오가 그 계획을 포기해버리자 이 조각 계획 역시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이 일로 레오나르도는 조각가로서의 자신의 작업에 또 한번 크게 실망했을 것이 틀림없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예술 방면의 일에 비해 그의 과학 활동은 꽃을 피웠다. 해부학 연구는 파비아 출신의 유명한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 델라 테레와 함께 협력하여 새로운 차원을 이룩했다. 그는 인체와 그 기관의 정확하고 상세한 도해뿐 아니라 비교해부학과 생리학 전반에 걸친 작업 계획을 세웠다. 그밖에도 수학·광학·기계학·지리학·식물학 연구로 가득한 필사본을 제작했는데, 이는 〈지각의 우주론 perceptual cosmology〉을 위한 자료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말년(1513~19)
1513년 프랑스인들이 밀라노에서 당분간 축출되는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 60세가 된 레오나르도는 또 이사를 해야 했다. 그해말 그는 새 교황 레오 10세의 형제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통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로마로 갔다. 줄리아노는 바티칸에 있는 그의 저택 벨베데레 궁의 방들을 그에게 주었고 월급도 많이 주었으나 큰 일은 맡기지 않았다. 3년 동안 레오나르도는 도나토 브라만테가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고 라파엘로가 교황의 새 저택의 방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로마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묘를 완성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페루치, 티모테오 비티, 소도마 같은 젊은 화가들이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공방에서 수학을 연구하다가 기술적인 실험을 하고 도시를 거닐며 고대 건물들을 살펴보곤 하는 등 낙담해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브라만테와 사귄 듯하나 브라만테는 1514년에 죽었고, 다른 예술가들과는 사귄 것 같지 않다. 그런 고독함 때문에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랑스로 갔던 것 같다. 1516년말 그는 가장 충실한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함께 이탈리아를 영원히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3년간을 루아르 강변의 앙부아즈에 있는 왕의 여름 궁전 근처 클루(후에 클로뤼세라 부름)의 작은 집에서 보냈다. 그는 '왕의 수석 화가·건축가·기술자'라는 자랑스런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무렵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고 불가사의하며 신비스런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을 그린 것이 전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과학 연구를 분류하고 편집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또 회화에 관한 논문의 마지막 초고와 해부학에 관해서도 몇 장 썼다. 〈떠다니는 인물 Floating Figure〉(윈저 성 왕실도서관 소장)과 같은 마지막 소묘들은 소멸하지 않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해준다. 〈세상의 종말 Visions of the End of the World〉이나 〈대홍수 Deluge〉(윈저 성 왕실도서관 소장) 같은 소묘에서 그는 엄청난 상상력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힘을 묘사했다.
1519년 5월 2일 레오나르도는 클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생플로랑탱이라는 궁정교회에 안치되었으나 19세기초 그 교회가 완전히 철거되어 그의 무덤 또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작품과 과학적 유산은 프란체스코 멜치가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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