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세계

3.1절과 유관순 열사

마 음 2011. 2. 28. 21:13

 

 옥중에서의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 표준 영정

 

 

 

유관순

1902년 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

유관순(柳寬順, 1902년 음력 11월 17일/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의 모진 고문으로 18세 때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생애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흥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작은아버지는 감리교회에서 일요일에만 교회에 올 수 있는 선교사들을 도와서 평일에 교회일을 맡아보는 분이었다.

공주에서 전도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 부인(미국이름 엘리스 샤프)의 권유로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보통과를 졸업한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샤프 부인은 집안 사정이 어려운 유관순을 배려하여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3.1운동 참여를 만류했으나, 학교 담을 넘어가서 3.1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헌병대는 유관순의 부모를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여 검사국으로 이송하였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선고 되었다. 다시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당시 서대문감옥에서는 고문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화학당 교사들의 항의로 시신을 내주었다고 한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본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골이 없어졌기 때문에,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1947년 조직됨)에서 1989년 10월 12일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다. (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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