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덕수궁 돌담길

마 음 2012. 11. 1. 18:12
728x90

 

 

 

 

 

 

 

 

 

 

 

 

 

 

 

 

 

 

 

 

 

 

 

 

 

 

 

 

 

 

 

 

 

 

 

 

더보기

덕수궁 요약설명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원래는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하였던 선조가 환도하여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다가 광해군 때 정식으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하여 정궁으로 삼은 후 이곳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대한제국의 궁궐
구한말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했던 고종은 1897년 1월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경운궁 주변에 외국 대사관들이 밀집하여 있었으므로 고종은 그같은 국제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같은 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하면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907년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데, 이때 그가 거처하던 궁도 ‘상왕이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퇴위의 의미가 담긴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가장 번성했던 1900년 초에는 궁의 영역이 서쪽 경희궁과 구름다리로 연결될 정도로 확대되었으나 고종황제 승하 후,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되면서 덕수궁도 그 위상을 잃고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1933년에는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원래 궁역의 30퍼센트 정도이며 전통건물 외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건물 내부에 서양식 장식들이 혼재되어 있어 격변기 혼란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세설명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실에서 옮김)

 

 

오늘 일정으로 덕수궁을 가려고 해서 간 것은 아니고 남대문시장 카메라 타운에 자리 잡고 있는 Nikon 카메라 as 센터에 며칠 전에 맡긴 카메라의 수리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으러 갔다가 시간도 어정쩡해서 가까운 덕수궁에 들렀다가 덕수궁 돌담길과 서울성곽 길을 따라서 인왕산을 들러 집으로 돌아오는데 오늘 기온이 완전히 겨울 날씨처럼 차갑고 바람도 많이 불고 그렇습니다. 이제는 겨울 채비를 하고 바깥나들이를 해야만 할 것으로 여겨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