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세계

서대문독립공원 서재필 선생상

마 음 2013. 1. 5. 22:02

 

 

 

서재필

전남 보성 충생
한말·일제시대의 정치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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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이며,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필립 제이슨.

일본유학과 갑신정변아버지는 광언(光彦)이다. 어렸을 때 친척인 광하(光夏)에게 입양되었고 7세 때에 상경하여 양모(養母)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2년(고종 19)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김옥균·서광범 등과 사귀었다.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도야마 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학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의 승락을 얻어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이 되었으나,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1884년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정변계획중에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조선주둔 일본군 무라가미[村上] 중대장 간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정변진행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정권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었다.

망명시기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일본이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외국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자 1885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에 있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1889년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때는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 1894년 6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
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망명중 미국에 들른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들여 1895년 12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개화파정부는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이에 개화파정부와 근대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는 한편, 1896년 1월에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국내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까지 발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영문판 〈The Independent〉로도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이상재·남궁억·이완용·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초기에 고급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립협회는 이후 토론회·구국상소·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에 노력했다. 또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면서 1896년 11월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낀 러시아는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으로 중추원고문직에서 해고되자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활동
그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를 파는 필립제이슨상회를 경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다.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영문기관지로 〈한국평론 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순난자〉·〈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행하여 배부했다. 이 책들은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 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이 결성되어 구미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1920, 1921년에는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열기도 했다. 1921~22년 워싱턴에서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대표 도쿠가와[德川家達]에게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조선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에 보냈다.

서재필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의 사장으로 사업에 종사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송진우·백관수·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잔학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1926년 펜실베이니아의과대학의 특별학생으로 등록했으며 그후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는 한편, 몇 편의 병리학 관계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업의로 생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징병검사관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의 잡지에 대개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몇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동아일보〉에 〈회고갑신정변〉과 〈체미오십년〉이라는 글을 영문으로 적어 보내어 번역·수록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청 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했다. 1948년 국회에서 행해진 대통령선거에서 1표를 얻기도 했으나 외국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무효로 처리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