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 여성테마길
조선시대 여성전문직 "궁녀"를 찾아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비문을 갖춘 궁녀 묘는 지금까지 3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말산에는 그중의 하나인 임상궁 묘(보모상궁)가 있으며, 궁녀로서 정1품 후궁에 오른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 씨의 부모 묘가 있어 은평구가 궁녀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친화도시인 은평구에서는 조선시대 왕실의 의식주를 책임졌던 전문직 여성인 궁녀의 이야기를 담아 여성테마길을 조성하였습니다.
은평 여성테마길
궁녀는 어떤 여성인가?
"왕실의 의식주를 책임진 전문직 여성"
궁궐에는 왕과 왕실 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이들과 함께 궁궐 안에서 생활했던 여성들이 궁녀이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여관(女官)이라 하여, 여성 관리를 뜻하였다. 나인(內人)으로도 불렀던 궁녀들은 한글과 한문, 바느질, 요리 등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각 처소에 배치 되어 왕실의 의식주를 책임졌다. 궁궐의 법도를 지키며 각 처소의 다양한 일들을 도맡아 했던 궁녀는 왕조시대 여성공무원이었으며, 한 분야에 수십 년씩 종사했던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조선왕조가 패망하면서 궁녀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왕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궁녀의 역사는 궁중문화를 이끌어온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궁녀테마길은 역사 속에서 이름없이 사라져 간 여성의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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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궁 - 궁녀의 자격
"궁녀는 어떻게 될 수 있나요?"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대비, 세자 등 왕실 가족은 각자의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했으며, 그에 속한 궁녀들도 독립적으로 배치되었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처소의 궁녀에 대해서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궁녀들은 자신이 모시는 상전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평생 동안 삶과 죽음을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였다.
신입궁녀의 체용 조건과 과정 : 주로 왕실, 관청 소속의 여종 중에서 선발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민 여성들도 선발.
나이제한 ; 10세 전후로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시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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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 업무와 체계
"궁녀는 무슨 일을 하나요?"
궁녀들의 신고식 입궁한 궁녀 후보생들은 섣달 그믐날 밤(음력으로 한해의 마지막 날)에 신고식을 치렀다. 환관(내시)들이 마당에 한 줄로 선 궁녀들의 입에 횃불을 가져다 지지는 시늉을 하며 "쥐부리 글려, 쥐부리 글려"라는 말로 위협을 하는 무서운 신고식을 통해 어린 궁녀들에게 각 처소의 비밀을 유지하도록 말조심을 시켰다.
교육은 선배 궁녀가 개인지도를 해주거나, 일을 옆에서 보며 따라하게 하였다. 수습 나인은 입궁한 지 15년쯤 지나면 관례를 올리고 정식 궁녀가 되었다. 이때 원삼을 입고 노리개와 화관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잔치 음식까지 마련하여, 마치 혼례를 치르는 것 같았다. 이 과정을 거치면 정식 궁녀가 되어 월급이 나왔다. 9품부터 5품까지가 궁녀체계인데, 5-6품에 오른 궁녀를 "상궁"이라 하고 그 아래 궁녀를 '나인'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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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 궁녀의 최고직
"같은 상궁인데도 차이가 있나요>"
정식 궁녀로 15년 정도 근무하면 궁녀의 최고직인 '상궁'에 오를 수 있었다. 수습나인부터 시작해서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상궁은 직위에 따라 서열화 되어 있었다. 같은 품계라도 서열을 중시하는 것이 궁녀 조식의 특징이다. 정5품의 품계를 가진 상궁들은 특정 업무를 맡을 경우 그 업무의 이름에 따라 불리기도 하였다. 상궁은 '마마님'이란 존칭으로 불렸으며 궁녀 조직의 핵심이었다.
상궁들의 서열
제조상궁 : 상궁의 가장 우두머리로 "큰방상궁"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궁녀를 지휘하고 통솔. 어명을 받들고 내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리하며, 궁녀들의 제상이라고 함.
부제조사궁 : "아랫고상궁"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왕실의 사유재산인 내전의 창고를 책임지고 관리.
지밀상궁 : "대령상궁"이라고 하며, 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심.
감찰상궁 : 궁녀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평가하여 잘못을 저지른 궁녀에게 형벌을 내리기도 함.
보모상궁 : 왕자와 공주의 보모 역할을 하는 상궁.
서사(시녀)상궁 : 지밀에 속하는 상궁으로서 서적이나 문서에 관련한 일을 하고 잔치 때는 수행 담당.
일반상궁 : 각 처소에 배치되어 궁녀들을 통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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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1670~1718)
이말산에는 숙빈 최씨의 아버지 최효원과 어머니 남양 홍씨 등 일가의 묘가 있다. 숙빈 최씨는 무관 집안 출신으로 침방나인에서 정1품 빈까지 올라간 궁녀이다. 인현왕후를 모셨던 최씨는 인현왕후가 쫒겨나고 희빈 장씨가 왕비에 오른 뒤, 인현왕후를 위한 기도를 올리던 중 숙종의 눈에 들었다. 이후 숙종의 후궁이 되어 숙원(숙종19년), 숙의(숙종20년), 귀인(숙종21년)으로 연달아 품계가 승격되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최씨는 아들 연잉군을 낳고 후궁의 최고 품계인 정1품 '숙빈'(숙종25년)에 봉해졌다. 연잉군은 정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1대 왕 영조가 되었다.
궁녀에서 후궁의 최고 신분에 올랐으며 후에 왕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는 "천성이 신중하고 단정하여 기쁨과 분노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여러 궁인들을 접할 때는 겸손하고 화목하여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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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에서 왕비까지 오른
희빈 장씨(1659~1701)
궁녀 중에서도 왕의 선택을 받으면 바로 "특별상궁"이 되었다. 이를 "승은상궁"이라고 하는데 특별상궁이 왕의 아이를 낳으면 후궁으로 승격되었다. 후궁과 궁녀는 모두 내명부에 속했으며, 후궁이 되면 처소가 따로 제공되고 신분상승과 더불어 가문의 위상도 높아졌다.
조선시대 궁녀출신으로 후궁이 되었다가 왕비까지 오른 여성은 희빈 장씨가 유일하다. 역관 집안의 딸로 태어난 장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사랑을 받았으나 대비인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출궁당했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입궁하여 첫 번째 왕자 윤(이후 정종)을 낳아 희빈이 되고 인현왕후가 쫒겨난 후 왕비에 올랐다. 5년 뒤 인현왕후가 다시 입궁하자 빈으로 강등되었는데, 얼마 후 인현왕후가 죽자 그 원인이 희빈 장씨가 신당을 만들어 죽기를 빌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희빈 장씨의 생가가 은평구 불광동의 은평구립도서관 부근 아미산 기슭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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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지위와 대우
"궁녀들은 월급을 얼마나 받았나요?"
궁녀의 지위와 대우는 입궁한 햇수에 따라 차이가 났다. 입궁 후 15년이 지나면 관례를 치르고 정식나인이 되며, 다시 15년이 지나면 궁녀 최고직인 정5품 상궁에 오를 수 있었다. 궁녀의 대우는 소속 부서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지밀의 지위가 가장 높고, 수방, 침방이 그다음이며, 세수간, 세답방, 소주방, 생과방의 지위가 낮았다. 8시간 일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 근무였고 야간 근무를 하는 지밀은 하루를 주간과 야간으로 나눠서 2교대 근무를 했다. 궁녀들의 교대 근무를 '번(番)살이'라고 불렀다.
궁녀들은 궁궐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주를 모두 제공받았다. 월봉(월급)으로는 쌀, 콩, 북어와 같은 현물을 받았고, 명절이나 왕실의 잔치, 능행차 등 특별한 날에는 특별 상여금까지 받아 당시에는 고액 연봉자였다. 상궁과 나인과의 급여 차이는 최고 5배 이상이나 되었다. 궁녀들은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어서 궁밖에 집이나 땅을 사면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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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자녀를 키운 보모상궁
상궁 임씨(1635~1709)
궁중에서 왕자와 왕녀 등 왕실 자녀의 양육을 담당하는 궁녀를 '보모상궁'이라고 하였다. 특히 미래의 왕이 될 세자의 동궁전에는 10여 명의 궁녀가 배치되었고 부보모상궁까지 두 명의 보모상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세자의 양육 책임자로서 교대로 격일 근무하였는데, 성격은 서로 정반대였다고 한다. 한 사람이 자애롭다면 다른 한 사람은 엄한 성격이었다. 왕의 유모에게는 특별히 종1품의 봉부부인이라는 작호를 주었지만 보모상궁에게는 품계를 높여주진 않아도 아보지은(아보지은(阿保之恩): 보호하여 잘 키운 은혜)이 있다 하여 사망하면 왕실에서 제사용품을 내려주고 재문을 써주었다.
이말산에 묻힌 상궁 임씨는 13세에 궁녀가 되어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등 40여 년간 네 명의 임금을 모셨으며, 사망 후 숙종이 친히 비문을 내렸다. 공주가 혼인할 경우 보모상궁은 공주를 따라 궁 빆으로 나가 함게 살았다. 상궁 임씨는 말년에 숙종의 동생인 면안공주의 집에서 살다가 75세에 생을 마쳤다. 왕실 자녀들에게 보모상궁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제2의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서 각별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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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궁 - 궁녀의 마지막
"궁녀는 언제 은퇴하나요?"
궁녀는 종신직이었다. 대체로 환갑이 넘으면 번살이(근무)도 낮에만 하고 일찍 쉬었다. 궁녀는 자신의 직장인 궁궐에서 평생을 근무했지만, 큰 병에 걸리거나 죽을 때는 궁궐을 나가 자신의 본가로 가거나, 절로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절에서 생을 마친 궁녀들은 불교적 장례의식으로 화장을 했고, 그 외의 궁녀들은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이 없었던 궁녀들의 무덤을 찾는 이가 별로 없어 관리나 유지가 잘 안 되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묘도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이말산에 남아 있는 임상궁의 묘는 무덤의 주인공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귀한 유적이다.
조선왕실에서 500여 년 동안 궁궐의 살림을 책임져왔던 궁녀들은 조선왕조의 궁중 문화를 유지시킨 왕실전문가였다.
은평 여성테마길 조선시대 여성전문직 '궁녀'를 찾아가는 길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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