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세계

유관순 열사

마 음 2007. 3. 1. 20:12

옥중에서의 유관순열사의 모습.

이번에 충남대 회화과 윤여환교수가 철저한 고증을 거처 새롭게 제작한 유관순열사의 영정.

유관순열사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자 아오내[竝川] 장터 시위를 주동하고 수감된 뒤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본관은 고흥(高興).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뒤 총독부 임시휴교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당하자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는 이종성(李鍾成)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예배가 끝난 뒤 조인원(趙仁元)·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여 즉석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으로 선출되어 20일 동안 수백 리를 왕복하며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던져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이 상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때문에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8·15해방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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