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북한산 시단봉에서 바라본 문화유산 북한산성

마 음 2012. 1. 31. 09:30

 

 

 

 

 

북한산 시단봉에 올라서서 백운대 만경대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만경대와 백운대가 한봉우리처럼 보이고 좌노적봉 우인수봉이 마치 삼각봉을 연출하여 주는데 그 아래로 만리장성처럼 길게 내려뻗은 북한산성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동안 훼손된 북한산성을 현재도 복원중이지만 대남문에서부터 대성문- 대동문- 시단봉- 동장대- 용암봉-만경대-백운대에 이르는 이곳 북한산성주능선은 복원이 거의 완료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높은곳에 무거운 돌을 운반하여 산성을 복원하는 작업이 쉬운일이 아니기에 어려움도 많고 비용도 적지않게 투입되는 작업으로 이처럼 잘 복원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면 우리민족의 자부심도 되살아나는듯합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앞으로 우리가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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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산성. 백제 개로왕 5년(132),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한편 북방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처음 쌓았다. 이후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초 거란이 친입하자 태조 왕건의 관을 이곳으로 옮긴 뒤 성을 증축했고, 고종 19년(1232)에는 이곳에서 몽고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겪은 조선은 북한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숙종 37년(1711)에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지금의 북한산성이 완성되었다. 13개의 성문과 130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들이 파괴되었다.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1990년부터 시작된 북한산성 제모습찾기 사업으로 성의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도성민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북한산성”

지금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 4월 3일에 착수되었다. 엄청난 대공사였기 때문에 축성할 구간을 나누고 이를 3군문(三軍門)의 군인에 분담시켰으며, 노임을 주는 모역군을 두었다. 또한 각종 장인은 물론 도성의 가구를 대, 중, 소로 분류하여 3명, 2명, 1명씩을 동원해 도성민들을 축성에 참여시켰다. 이 때 3만 내지 4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당시 도성의 남자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도성민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축성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불과 6개월 만인 그 해 10월 19일에 백운동, 만경봉, 용암봉, 문수봉, 의상봉 등 북한산의 연봉을 연결하는 석성을 완공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축성된 성곽의 길이는 약 9.5km에 달했다. 이 기간 동안 도성의 백성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와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다. 실로 도성민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성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돌로 된 성벽만 남겨 놓은 채 모든 시설물들이 사라지고 다시 잡목 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상세설명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