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구름 雲 cloud

마 음 2018. 3. 14. 18:39





공기 중의 수분이 이슬점(露點) 이하에서 응결하여 미세한 물방울이나 얼음입자로 되어 대기의 고층에 떠 있는 것을 구름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운(雲)이라고 한다. 구름을 형성하는 입자는 물·얼음 이외에도 매연이나 먼지와 같은 고체입자들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지면에 접하여 있는 것은 안개라 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을 구름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으나, 구름이 산에 걸려 있는 경우에는 산안개라고도 하여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구름의 형성과 소멸은 공기의 수직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기압의 발생, 산이나 강한 햇볕 등 여러 원인에 의하여 대기 속을 상승하는 공기덩어리는 높이 올라갈수록 주위의 기압이 낮아져서 공기와의 열교환 없이 팽창하게 된다. 이러한 단열팽창으로 공기의 온도는 점점 낮아지게 되며, 어느 고도에 이르면 이슬점에 이르게 되어 수증기가 응결된다. 이렇게 응결되기 시작하는 고도보다 더 높은 곳에서는 공기 중의 수증기가 작은 물방울이 되어 구름을 형성하게 된다.


또 다른 경우는 수증기를 많이 포함한 더운 공기가 찬 공기 위로 올라가거나, 찬 공기가 더운 공기 밑에 들어가 구름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구름은 모양에 따라서 권운(卷雲)·권층운(卷層雲)·권적운(卷積雲)·고층운(高層雲)·고적운(高積雲)·층운(層雲)·층적운(層積雲)·난층운(亂層雲)·적운(積雲)·적란운(積亂雲)의 10개의 기본운형(基本雲形)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기본운형은 구름의 형태와 내부구조에 의하여 다시 종(種)으로 나뉘고, 구름조각의 배열이나 투명도에 따라서 변종(變種)으로 세분된다. 종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한개의 구름에서 둘 이상의 종을 가질 수 없으나, 변종은 여러 기본운형에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한 개의 구름에도 몇 가지 변종의 명칭이 붙여질 수 있다.


구름은 때때로 그 밑에 붙은 일부분이 특색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보충형(補充形)과 원래의 구름과는 별도로 작은 구름이 부수하여 나타나는 부속운(付屬雲)으로도 세분된다.구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전형적인 것은 드물고 중간적 성질을 띠는 것이 많다. 따라서 구름의 판별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으나, 구름의 발생·발달·쇠약·소멸의 과정을 주의깊게 관찰하면 비교적 정확한 구분을 할 수 있다.


구름의 관측은 일반적으로 운형(雲形)·운량(雲量)·운고(雲高)·운향(雲向)·운속(雲速) 등에 대하여 행하여진다. 운량은 구름이 덮은 부분을 전체 하늘의 10분수로 표시하며, 0에서 10까지의 정수로 나타낸다. 운량을 결정할 때는 구름의 농담(濃淡)은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전혀 구름이 없거나 5% 미만의 경우를 운량 0, 구름이 덮인 부분이 전체 하늘의 10분의 3 가량이면 운량 3, 구름이 하늘 전체를 덮거나 95% 이상일 때는 운량 10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운량이 0∼2일 때의 날씨를 맑음, 3∼7 사이를 갬, 8∼10을 흐림이라 한다.


운고는 관측장소의 지면으로부터 구름 밑까지의 높이를 말하는데 100m 단위로 표시한다. 일반적으로는 고도에 따라 상층운·중층운·하층운으로 구분하는데 빈번하게 나타나는 구름의 형태가 다르다. 운향은 구름이 진행하여 오는 방향을 말하며 8방위로 나눈다. 운속은 구름의 이동속도로서 느림을 1, 보통을 2, 빠름을 3으로 하여 3계급으로 나누어서 관측한다.


구름은 우리들에게 날씨의 변화를 알려주는 주요 기상요소 중의 하나로서, 기압·기온·바람 등과는 달리 직접 눈으로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관천망기법(觀天望氣法)에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기상요소들에 비하여 직접 우리 일상생활에 큰 피해를 주지 않으므로 그다지 기록이 많지는 않은 편이며, 그나마 기록의 대부분이 구름이 낀 모양이나 상황 등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관청망기, 즉 구름 모양으로 날씨를 예상하는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삼국시대의 구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① 신라 탈해왕 3년(59) 3월:왕이 토함산에 오르자 양산과 같은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뜨더니 한참 있다가 흐트러졌다. ② 백제 고이왕 26년(259) 9월:궁성 동쪽에 청자색(靑紫色)의 구름이 일었는데 마치 누각과 같았다.

③ 백제 비류왕 24년(327) 7월: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에 비하여 구름의 색상이나 길이·시간·방향·형태 및 운량에 관한 관측기록이 좀더 자세하게 남아 있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실례를 ≪고려사≫에서 찾아보면,

① 태조 19년(936) 9월:왕이 3군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군사를 회합하고…… 전고(戰鼓)를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득 칼과 창 같은 형상을 한 흰구름이 우리 군사의 머리 위에서 일더니 적진을 향하여 날아갔다.

② 선종 9월(1092):서경으로 왕의 어가(御駕:임금이 타는 수레)를 수행할 때 자색구름이 공(뒤의 숙종)의 장막 위에 어리니 이 기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장차 왕이 될 징조라고 하였다.

③ 예종 17년(1122) 4월 임신(壬申):저녁 때에 검은 구름이 북서쪽에서 일었는데 때로는 푸른 기운이 구름 사이에서 나오고 때로는 붉은 기운이 좌우에서 끼더니 동남방을 향하였다가 18시경에 사라졌다.

④ 명종 8년(1178) 10월 신묘(辛卯):한밤중에 짙은 구름이 검게 뒤덮었다가 서북쪽에서 은은하게 광명이 땅을 밝혀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일 정도였는데 밤새도록 그러하다가 사라졌다. ⑤ 고종 11년(1224) 9월 을축(乙丑):붉은 구름이 남서방향으로부터 북쪽에 이르렀는데 화영(火影) 같았다.

⑥ 고종 42년(1255) 1월 경자(庚子):길이가 500척(尺)이나 되고 너비가 2척쯤 되는 흰구름이 동서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⑦ 고종 44년(1257) 6월 갑술(甲戌):노랗고 붉은 구름이 하늘을 둘렀는데 여러 날 계속해서 낮과 밤이 밝았다.

⑧ 원종 원년(1260) 11월 기미(己未):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흑운(黑雲)이 하늘에 퍼졌는데, 22시경에는 붉은 기운의 줄기가 북서와 남동의 두 방향으로부터 일어서 하늘에 뻗쳤으며, 24시경에는 북서방향으로부터 일어서 하늘로 뻗쳤다.

⑨ 원종 10년(1269) 1월 을미(乙未):밤에 흰구름 한줄기가 남동방향으로부터 일어서 하늘로 뻗쳤는데 너비가 3척 가량이었다. ⑩ 공민왕 14년(1365) 7월 갑신(甲申):밤에 동쪽에 붉은 구름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구름이 끼어서 일식 또는 월식을 관측하지 못한 기록, 구름이 없는 하늘에서 비나 천둥이 울렸다는 등의 구름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들도 있다. 또한 구름에 대한 여러 가지 관측과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운둔(雲屯)·운합(雲合)·운래(雲來)·운췌(雲萃)·운취(雲聚)·운산(雲散)·운하(雲霞) 등은 구름의 생성, 소멸하는 모양을 나타낸 표현이며, 운상(雲上)·운제(雲梯)·운니(雲泥) 등은 구름의 높이에 대한 표현으로 오늘날의 상층운(上層雲)·중층운(中層雲)·하층운(下層雲)의 구분과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구름에 의하여 앞으로의 날씨를 예측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 같다. 즉, 구름의 상태를 보고 비가 오겠다 혹은 개겠다는 등의 오늘날의 일기예보와 같은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실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① 영조 9년(1733) 5월 병오(丙午):가뭄 때에 비를 얻은 영조는 “어젯밤 밖에 나와 정원 가운데 서 있노라니 동남쪽에 음운(陰雲)이 있고 이슬 비가 얼굴에 스며내린다. 비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때라 근심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에 빗소리 듣고 나도 모르고 넘어졌다가 일어섰다.”라는 기록이 있다.

② 정조 원년(1777) 5월 정묘(丁卯):간혹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으나 그 양은 인색할 정도로 적다. 구름이 서쪽 교외로부터 오면 바라는 비는 오지 아니함을 예상할 수 있다.

③ 순조 11년(1811) 4월 갑인(甲寅):순조임금의 “오늘 곧 비가 올 기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은 “풍운의 기가 대단히 왕성하여 많은 비가 기대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와 같이 구름의 색깔이나 모습 및 이동방향 등을 관찰하여 강우의 유무를 예측한다는 것은 가장 자연적인 과학적 방법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함경도 함흥조에는 “성천산(城串山)은 부(府)의 북쪽에 있는데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 한다. 산허리에 작은 샘이 있고 구름이 발생하면 곧 비가 온다.”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청도군조에는 “오산(鰲山)은 군의 남쪽 2리에 있는 진산이다. 동쪽으로는 고사동(高沙洞)이 있는데 하늘에서 비바람이 불려고 하면 그에 앞서 산이 울리고 구름기[雲氣]를 분출한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내리고 골짜기 밖으로 나오면 바람이 분다. 또한 크게 울리면 하루 만에 비가 올 조짐이 있으며 작게 울리면 2, 3일 사이에 조짐이 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영천군 누정(樓亭)조에 실린 정몽주의 시에, 명원루(明遠樓)를 읊은 내용 중 “남쪽에 황색구름이 끼어 있으니 풍년이 들 것을 미리 안다.”는 구절이 있는데, ≪지봉유설≫ 천문부 풍운조(天文部風雲條) 등에도 같은 사상이 보인다. 또 정조 22년(1799) 11월 6일 김양직(金養直)의 말 속에도 같은 내용이 발견된다.

이 무렵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명나라의 ≪천원옥력 天元玉曆≫에도 자주 운점(雲占)이 나오고 있어 이와 같은 사상은 대부분 이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의 사시찬요편(四時纂要篇)의 원조·입춘·춘분·하지 등의 조에도 같은 사상이 보이는 외에 같은 책의 전가점후(田家占候)의 운점(雲占)의 조항에는 “구름이 동으로 가면 맑음, 서로 가면 비, 남으로 가면 비, 북으로 가면 맑다. 윗바람[上風]이 열려도 대풍이 사라지지 않으면 비가 온다. 구름이 사방의 들에 낮게 깔려 안개나 연기와 같은 것을 풍화(風花)라고 한다.


구름이 동남으로부터 오면 절대 비가 없다. 운진(雲陳)이 서남으로부터 발생하면 반드시 많은 비를 내린다. 대개 우진(雨陳)이 서북에서 발생된 것은 반드시 구름이 검어 먹물이 발하는 것과 같으며 또 반드시 미량진(眉梁陳)을 이루고 대풍이 먼저 분 후에 비가 내리고 맑아지기 쉽다. 구름이 만약에 생선비늘과 같이 하늘에 퍼지면 비는 오지 않고 풍전(風顚)한다. 가을 하늘에 구름이 걸치거나 바람이 없으면 비는 내리지 않는다. 겨울 하늘에 비늘이 늘어선 것과 같은 구름(老鯉班雲)이 발생하여 점차 짙게 흐려지면 비는 오지 않는다. 이것을 호상천(護霜天)이라 부른다.


천하중(天河中)에 검은 구름이 생기고 있으면 이것을 흑저하(黑猪河)를 건넌다고 한다. 검은 구름이 서로 마주보고 일어 한줄로 서로 접하여 하늘에 뻗치면 곧 큰비가 내린다.”고 하는 등 구름의 동향으로 날씨를 예상하려는 슬기를 엿볼 수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을 보면, 북부여 건국 시조 해모수(解慕漱)는 하늘에서 내려올 때 다섯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따르는 사람 백여인은 깃털 옷을 화려하게 입고 고니를 탔으며, 풍악소리 울리는데 채색 구름이 떴다고 하였다.


해가 떠오르고 햇빛이 구름에 비치는 광경을 보면서 그런 장면을 상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해모수가 유화(柳花)와 관계하여 주몽(朱蒙)을 잉태하게 하고는 홀로 붉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주몽을 위하여 성을 쌓고 궁전을 지을 때에는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른 시기의 신화나 서사시에서는 구름이 천상의 권능을 상징하며,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할 수 있게 하는 탈것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낭지승운(郎智乘雲)’ 대목에서 도통한 스님 낭지가 구름을 타고 멀리 중국까지 자유롭게 내왕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그런 사고방식이 이어졌다. 고려의 선승(禪僧)들은 흰 구름인 ‘백운(白雲)’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여, 자기 호로 삼고, 암자에도 사용하고 시로 지어 읊는 경우가 흔하였다. 경한(景閑)은 호를 백운이라 하고, 백운을 읊은 시로 무심무아(無心無我)의 경지를 전하였다. 형체가 없고 빛깔이 희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어디로든지 떠돌아다니는 구름이 불법의 높은 경지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보우(普愚)는 소요산(逍遙山)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암가 白雲庵歌>라는 장시를 짓고, 무심히 떠도는 백운이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면 만물을 살린다고 하는 것까지 들어 백운으로 불법(佛法)을 상징하는 의미를 확대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산수화에 흔히 구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름과 안개가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희고 몽롱한 자태를 드러내면서 아득하고, 그윽하고, 운치있는 느낌을 준다.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가 그 좋은 본보기이다.


크고 험상궂은 바위가 겹겹이 늘어선 한 쪽 모퉁이에 운무가 은은히 서려 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도원이 아득히 멀다. 흔히 볼 수 있는 산수를 그릴 때에는 검고 무거운 바위와 희고 가벼운 구름이 서로 어우러져 대립과 조화를 빚어내었다. 그런 화풍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다가 정선(鄭敾)의 명품 <인왕제색도 仁旺霽色圖>를 산출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그림은 인왕산에서 비가 개어 구름이 걷히고 바위가 드러나는 장면을 선명하게 그렸는데, 우람찬 바위가 뭉게구름 위에 자리를 잡은 점이 특이하다.


산수화에서 구름은 경치의 한 요소로서 화면 구성을 다채롭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 여유와 생각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구름을 읊은 시조도 적지 않다. 경치를 묘사하면서 “白雲 깁흔 골에”, “白雲이 이러나니” 등으로 말할 때에는 산수화에서의 구름을 다시 볼 수 있다 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白雪이 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라고 한 이색(李穡)의 시조에서는 험란한 모습을 한 구름이 고난의 상징이다.

윤선도(尹善道)는 “구룸 빗치 조타나 검기 다”고 하여, 구름빛은 한결같지 않아 아름다워도 격이 낮다고 하였다. “구룸이 無心 말이 아도 虛浪다.”라고 하는 말로 시작된 이존오(李存吾)의 시조에서는 햇빛을 가리는 구름에다 견주어 임금의 지혜를 흐리는 간신의 책동을 나무랐는데, 시조에서는 구름을 이렇게 다루는 예가 흔하다. 윤리적인 주제를 앞세우다가 구름이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단순화시켰다.


현대시에서는 구름이 더욱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김소월(金素月)의 <구름>에서는 “저기 저 구름을 잡아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이라고 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 구름을 타고 임에게로 가, 비가 되어서라도 임에게 안기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구름이 사랑의 정열을 다각도로 나타내게 하였다.


이병기(李秉岐)는 <구름>에서, 구름이 되어 허공에 떠 어디로든지 자취없이 가고 싶다고 하였다. 황석우(黃錫禹)의 시집 ≪자연송 自然頌≫에서 갖가지 천체나 기상 현상을 다룬 것으로 보이는 <달밤의 구름떼>는 구름의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구름을 달을 구경하거나, 전송 하려고 나온 “시골 婦人들” 또는 “村有志 마누라떼”와 같다고 하였다. 그 이후에 구름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시가 자주 등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대회화에서 구름을 즐겨 그리는 방식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속담이나 수수께끼에는 구름에 관한 것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두꺼워야 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이 ‘구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