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로

은평구 관내 공원을 산책하다

마 음 2024. 7. 1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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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 22길 9-30에 위치하고 있는 "대조 어린이공원"은 공원 내에 작은 공연시설을 갖추고 있고 다양한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는 공원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저출생 문제의 심각성을 이곳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어린이공원에 어린이는 찾아보기 어렵고 노인들이 어린이공원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다.

 

    

 

대조 어린이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연서로를 따라 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37가길 10-12에 있는 "새장골 어린이공원"에 들렀는데 공원에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아무도 없었다. 새장골 어린이공원은 규모가 작고 조금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공원 옆에 구립 개나리 어린이집이 있어 이곳의 어린이들이 가끔 이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공원 내에 있는 놀이시설은 미끄럼틀과 그네 시이소오가 전부였다. 새장골 어린이공원을 나와 구파발천으로 내려가 본다.  

 

 

     

구파발천의 인공폭포에는 시원한 폭포가 가동 중이었다. 구파발천에 물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번 장마에 서울지역에는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파발천을 계속 내려오면 분수대가 있는 지점이 있는데 분수대 주변이 우물골 근린공원이다. 우물골 근린공원으로 내려가 본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2로 77 소재 "우물골 근린공원"

 

 

 

 

우물골 근린공원에도 한적하기는 마찬가지다. 

 

 

 

구파발천의 우물골 근린공원을 돌아나와 구파발천을 따라서 계속 내려가 본다.

 

 

 

구파발천의 끝지점 창릉천과 합류하는 지점의 "은평지문교" 위로 올라가 "금암문화공원"으로 가본다.

 

 

 

은평지문교로 올라오면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북한산로를 따라서 걷게  되면 북한산로 옆으로 "금암문화공원"을 만나게 된다. 금암문화공원으로 들어가 본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소재 "금암문화공원"

 

 

 

금암문화공원은 넓은 면적을 갖고 잇도 다양한 놀이시설과 함께 역사문화유적이 있는 공원이다.

 

 

 

하마비

말에서 내려 걸어감으로써 예의를 표시하라는 문구를 새겨서 궐문(闕門) · 능묘(陵廟) · 문묘(文廟) · 서원(書院) 등의 입구에 세우는 비석.

 

 

 

"금암기적비"가 있는 역사문화공원이다.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는 조선 정조가 1781년 8월 증조할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 사적 제98호)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5~1776)의 옛 일을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써서 건립한 비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금암은 의주(義州)로 가는 역참(驛站)이었다. 정조는 1781년 8월 명릉을 참배하는 길에 금암에 이르러 할아버지 영조가 남긴 자취를 둘러보고 경기도관찰사에게 오랜 세월에 스러진 참사를 새로 짓고 빈터를 닦아 비를 세우도록 했다.

현재 참사는 없고 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이 얹혀있다. 비문 말미에 “소자가 왕위를 이은 지 5년째 되는 신축년 가을 팔월 초 길일에 삼가 짓고 써서 15일에 세우다”(小子嗣位之五年辛丑八月初吉日 敬製敬書 十五日立)라고 했듯이 정조가 직접 짓고 쓴 것이다. 글씨는 단정한 정자체로 18세기에 유행되던 서풍이다.

 

비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으로 있었을 때인 경종 원년(1721) 8월 15일 부친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농사(農舍)에서 닷새 동안 머물렀다. 장차 대궐로 돌아가 기거하기 위해 말 한 필과 시동(侍童) 두 명을 데리고 저녁에 출발했는데,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러 밤이 깊고 불도 없어 금암(黔巖)의 참사(站舍)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를 몰고 앞 내를 건너고 있었는데, 뒤따르던 사람이 도둑이라고 알렸다. 영조는 이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참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작년의 흉년으로 기한(飢寒)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밭을 갈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리이나 그 또한 직책이니 그대가 처리하라”라고 했다. 이에 참장은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적을 관청에 알리지 않았다. 날이 밝자 길을 떠나 도성에 도착했는데, 이미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어 학가(鶴駕, 세자의 수레)가 궁문 밖에서 의례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 영조 32년(1756년) 봄 영조는 명릉에 일이 있어 거둥 하는 차에 그 참사에서 다시 머무르게 되었고, 이에 이성신을 찾았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그의 아들 이인량(李寅亮)을 찾아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아비의 옛 관직을 주어 세습하도록 하였다.

 

 

 

 

금암문화공원을 돌아보고 다시금 북한산로를 따라서 걷는다.

 

 

 

북한산로에서본 북한산 풍경. 왼쪽에서부터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용암봉- 의상봉이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3 덕수천 근린공원의 개천에는 물이 조금도 흘러내리지 않은 모습이다. 개천은 이말산의 북쪽방향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들어오는 개천으로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덕수천(德壽川) 유래
덕수천은 은평구 진관동 북쪽을 흐르는 하천으로서, 현재는 창릉천이라고 부르는 하천이다. 북한산성 대남문 북쪽에서 발원하여 삼각산 대서문 수로를 나온 하천이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고 행주산성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된다.
삼각산 문수봉 대남문 북쪽에서 발원하여 북한산성을 관통하여 흐르고 대서문 수구를 나와, 고양시와 양주시의 경계를 이르는 상장봉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만나 서쪽으로 흘러 은평구와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고 행주산성 아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 제1지류 하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