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남산공원 백범 . 안중근 광장 산책

마 음 2024. 11. 1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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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연상(蓮上), 초호는 연하(蓮下), 활동기 이후의 호는 백범(白凡)이다. 아명은 창암(昌巖)이었다가 동학 입도 후에 창수(昌洙), 그 후 구(龜, 九)로 개명하였다. 불교 입교 시기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가, 환속 후 유랑기에는 잠시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을 썼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공부를 좋아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일급 서당에 가지 못하였다. 9세부터 서당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차린 서당과 이웃 동네 서당에서 항상 일등을 차지하였다. 14세에 평민 출신인 훈장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 ・ 한당시(漢唐詩) ・ 대학(大學) ・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하여 과거 초시시험공부를 하였다.

 

17세인 1892년 해주에서 경과(慶科)의 초시(初試)가 해주에서 열리자, 정훈장의 권고로 과거시험을 보러 해주 관풍각(觀風閣)에 갔으나, 온통 부정투성이인 시험의 실상을 확인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반상의 차별을 한탄하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수개월 만에 그를 따르는 연비(蓮臂, 신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팔봉(八峯) 접주(接主)에 임명되었는데, 황해도 ・ 평안도 동학당 중에서 가장 어린 접주로 가장 많은 연비를 이끌었다고 하여 ‘아기 접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1894년 19세의 나이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황해도 동학군 선봉장에 임명되었다. 700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황해도 동학군과 함께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그가 담당한 서문 공격은 계획대로 되었으나, 본대는 남문에서 패전하였다. 그 후 동학군 토벌을 위해 기병한 진사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과 만나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하고 구월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해산한 다음,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집에 은신하였다. 안태훈의 집에서는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의 강의와 훈도를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5년 (음)8월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 및 일본 낭인배들이 궁궐을 야습하여 명성황후 시해 만행을 자행하자, 그해에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고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만주 삼도구(三道溝)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는 강계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에 눌려 패전하였다.

 

1896년 2월 안악으로 돌아오다가, 치하포(鴟河浦)의 객줏집에서 상인으로 변복하고 밀정 활동을 하던 일본군 특무장교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발견하고는 국모의 원수 갚는 일의 하나로 그를 처단하였다. 쓰치다 처단으로 투옥되어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옥중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차츰 개화 의식을 갖게 되었다. 1897년 7월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한 달 후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라는 고종황제의 특명이 내렸다.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하게 되자 1898년 3월 탈옥하여 계룡산 갑사를 거쳐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하였다.

 

 

25세인 1900년 환속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신교육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이름을 김구(金龜)로 고쳤다. 1903년에는 황해도 장연읍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였고, 이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 예수교회 에벗(Evert)청년회 총무로 일하였다. 에벗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하였다가,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전덕기(全德基) ・ 이준(李儁) ・ 이동녕(李東寧) ・ 최재학(崔在學) ・ 조성환(曺成煥) ・ 김병헌(金炳憲, 후에 별명 王三德) 등과 함께 을사늑약 무효화 상소 운동 및 가두 연설을 전개하였다.

 

1906년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총감이 되어 황해도에서 신교육 구국운동 ・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초 동지들과 함께 안악에 양산학교(陽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창립되자 황해도 총감(總監)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공화제’의 민주국가 건설을 공식 목표로 설정한 국권 회복 운동 단체였다. 그는 서명의숙과 양산학교의 교원, 해서 교육총회의 총감, 재령 보강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며, 황해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총 지도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비밀리에 열린 전국간부회의에서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독립군 기지 건설을 결정하였다. 황해도 총감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군자금과 애국 청년 모집 그리고 만주에 독립군 기지 창건 사업을 벌이던 중, 1911년 1월의 ‘안명근 사건’으로 신민회 황해도 지회 회원 160여 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15년 형을 선고받은데 이어, 1911년 9월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05인사건, 신민회사건)’으로 2년 형이 추가되었다.

 

감옥에서 김구의 ‘구(龜)’자를 ‘구(九)’자로 바꾸고, 호를 평민이라는 뜻으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백범(白凡)이라고 지었다. 1914년 7월에 형기 2년을 남기고 가출옥되어 주거 제한의 요시찰을 받으면서, 친구 농장에서 농감으로 농민들을 지도 계몽 하다가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결성하고, 2월 14일에는 민주의원(民主議院)을 조직한 후 총리에 취임하였다. 1947년 3월 통일된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설하였다.

 

 

1947년 3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國民議會)로 개편되자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총회의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유엔 소총회가 ‘가능한 지역에 국한한 선거 실시’를 결정하자, 이것이 단독정부 수립에 의해 남북 분단을 고착시키며, 남과 북에 각각의 단독 정부 수립은 동족상잔의 내전(內戰)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며 반대하였다. 남북 협상으로 북쪽을 설득하여, 처음부터 통일 대한민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밝혔다.

 

1948년 2월 조국의 분단과 내전을 막고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4 김 회담」과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마친 뒤,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교장에서 고전을 읽으며 칩거하였다.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잔당들과 일부 권력 추구배들이 고용한 안두희(安斗熙)라는 하수인에게 암살당하였다. 일제가 일찍이 방대한 일제 군경 조직을 동원하여 60만 엔의 현상금을 걸고 집요하게 추격하였지만, 위해를 가하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를 해방된 조국 땅 수도 서울에서 친일파 잔당들이 백주에 시해한 것이다. 유해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백과사전 자료)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황해 해주부(海州府)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가슴에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가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자임(子任)이란 아명을 지어 주기도 했다. 태어나던 무렵 집안은 수천 석을 하던 해주의 대지주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고려 말 명유(名儒) 안향(安珦)의 후예이며, 누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향반계층이었다. 선조 중에는 무반(武班)으로 이름을 높인 이가 많았다. 아버지 안태훈은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 여덟 살 무렵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했으며 열서너 살 무렵엔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사륙병려체(四六倂麗體)를 익힐 정도로 문재(文才)를 지녀 인근에서 선동(仙童)이라 일컬었다.

 

서울로 유학한 안태훈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으나, 당시는 개항(開港)이니 개화(開化)니 하여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던 시기였다. 이때 안태훈은 전통 유학(儒學)에만 머물지 않고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에 앞장선 인사였다.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세력은 근대적 문물의 수용과 함께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한 인재 양성의 일환으로 개화파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년 70여 명을 선발할 때 안태훈은 그중에 뽑힌 개화파 청년일 만큼 개화에 적극성을 띠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으니, 안태훈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조선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안태훈은 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이듬해인 1885년에 7~80명의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골인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의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청계동의 산골 마을에서 보내게 되었다. 7~8세가 되면서 할아버지의 각별한 배려로 한문 수업을 받았는데 이후 10여 년간의 수학을 통해 유교경전과 조선역사에 관한 서적을 익혀 나갔다. 그러나 소년시절 학문정진에만 힘썼던 것은 아니다. 틈나는 대로 산을 타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고, 활쏘기나 말 타기와 사냥에도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청계동 집에는 여러 명의 포수들이 기식하고 있었는데, 포수들을 따라다니며 사냥이나 사격술을 익힐 수 있었다. 12세 무렵에는 말 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묘기를 부릴 만큼 능숙하였고, 15~6세가 되어서는 명사수(名射手)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 어린 소견에도 문약하기만 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업신여겨 백성이 군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라는 점점 약하여져, 만약 갑자기 외국 열강이 우리의 약함을 노려 침략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약(文弱)에서 벗어나 무강(武强)의 기품을 조성해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보다는 중국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같은 기개 있는 장부로서 역사에 남기를 바랐다.

 

안태훈은 아들의 그러한 심지를 헤아린 뒤로는 작은 아들인 정근(定根), 공근(恭根) 등에게는 글공부를 독려해도 큰아들에게는 공부하라고 꾸짖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남다른 용맹심을 지닌 큰아들의 기백을 키우는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9세 되던 해인 1897년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수년간을 천주교 전파에 힘을 쏟았으며, 평생 천주교 신앙을 깊이 간직하게 된다. 안태훈은 천주교 선교에 앞장서는 한편 본당 축성 사업을 벌여 산골동네인 청계동에 황해도에서는 두 번째 본당을 설치하는 적극적 열의를 보였다. 그 결과 1898년 4월에는 마렴에 있던 홍 신부(빌렘)가 청계동 본당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청계동은 황해도 포교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토마스(도마)란 영세명을 받았으며, 홍신부로부터 교리 수업 등을 받으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도 넓혀 나갔다. 20세 무렵에는 홍 신부를 수행하여 해주, 옹진 등지의 황해도 각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과 직접 접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면서는 ‘대학 설립’을 계획하는 한편 교인들의 억울한 처지를 대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뜨자 1906년 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사하였다. 진남포 이주는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에 뜻을 둔 것이었다. 상하이(上海)에서 곽 신부의 권유도 있었지만, 교육 사업은 일찍부터 가슴속에 품어 오던 일이기도 했다. 진남포에서의 첫 번째 사업은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한 일이었다. 삼흥이란 토흥(土興), 민흥(民興), 국흥(國興)을 말하는 것으로, 국토와 국민이 흥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삼흥학교의 교장을 맡았으며, 두 아우인 정근과 공근 등도 힘을 합하였다. 학생 수는 5~60명에 이르렀고, 처남 김능권(金能權)이 전답을 팔아 1만 5,000량을 기부해 학교 교사를 확장해 나갔다.

 

삼흥학교에서는 일반 과목 외에 교련시간을 두어, 목총, 나팔, 북을 사용하며 순군대식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 사립학교였던 삼흥학교는 뒤에 오성학교(五星學校)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삼흥학교 외에도 새롭게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면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다. 원래 돈의학교는 천주교 계통의 학교로서 해체될 형편에 있던 것을 인수한 것이었다. 돈의학교는 진남포 교당의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방(方) 신부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방 신부가 신병으로 진남포를 떠나며 해체될 상황에 놓인 것을 사재를 털어 인수한 것이었다. 돈의학교는 1907년 가을 서북 3개도의 60여 학교에서 5천여 명이 참가한 연합운동대회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둘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이 무렵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관계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1906년 10월에 설립된 서우학회는 계몽주의 단체로서 1908년 1월에 한북학회(漢北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칭하게 되는데, 서우학회에 관계했던 시기는 1907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때 국채보상금의 헌납에도 적극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이 관서지방에 파급되면서 부인 김 씨에게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 모두의 장신구 전부를 헌납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의 망국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해외 망명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1907년 가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직후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여 임시사찰(臨時査察)의 일을 맡아보면서 의병 기의(起義)의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의병 모집과 자금마련을 위해 힘을 쏟은 결과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동의회는 노령 연추(煙秋) 지방에서 국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준비단체였으며 동의회 회원은 의병과 다름이 없었다. 최재형은 당시 노령지역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서 의병 기의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의병부대를 결성한 뒤 국내진입작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함경북도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와 공동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독부대로 국내진입작전을 개시하였으니 이때가 1908년 6월이었다. 엄인섭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면(蘆面) 상리(上里)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붙잡은 포로를 석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의병부대가 큰 타격을 입고, 엄인섭이 떠나면서 의병부대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원망의 소리가 높았다. 때문에 의병의 재기가 쉽지 않았다. 그 같은 상황에서 1909년 1월(음력)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혈맹을 맺으니 단지동맹(斷指同盟)이 그것이었다. 이들이 단지동맹을 맺은 것은 당장에 의병 재기가 불가능하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기다려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단지동맹 후 주로 연추 지방에서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교육과 강연 활동을 전개하면서 의병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각 의거를 추진해 갔다. 의병 재기를 도모하던 상황에서 이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없었다. 즉, 자신의 활동 지역에 적장 이토히로부미가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격이었다. 이에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했다. 그리고 잠시도 지체 없이 즉각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 결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히로부미 포살을 결행하기 위해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한 것은 1909년 10월 21일이었다. 이때 이강은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을 맡고 있는 김형재(金衡在)에게 소개 편지를 써 주었다. 그리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포그라니치나야 역에서 내려 친지인 한의사 유경집(劉敬緝)을 방문하고 “가족을 마중하기 위해 하얼빈 방면으로 여행하는데 러시아 통역이 필요하니 아들을 동행케 해 달라”라고 간청해,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 도착하자 유동하에게 이토 히로부미 포살계획을 설명하고 협조 약속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대동공보』 하얼빈 지국의 기자 김형재를 찾아가 이강의 편지를 건네주었고,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을 합류시킬 수 있었다. 10월 23일경에는 김형재의 소개로 일행 4명은 김성백(金聖白 또는 成白)의 집으로 안내되어 하얼빈에서의 활동계획을 논의하였다.

 

당초 이들은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기하고자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와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 등 네 곳에서 의거를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경비가 모자라고, 실제 가동 인원도 부족해 부득이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의 두 곳으로 한정하여 계획을 추진해 갔다. 교차역으로서 기차가 쉬는 전략적 요처인 채가구에는 우덕순, 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은 자신이 맡기로 했다. 그리고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했다. 만약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 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지하면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차에 뛰어올라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 하기로 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하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실은 특별 열차는 오전 9시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출영 나온 제정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모종의 중요 회담을 한 뒤 9시 30분경 코코프체프의 선도로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출영 나온 각국 관민과 인사를 나누고 러시아 대장대신의 요청에 의해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한 이토 히로부미가 몇 걸음 되돌아서서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때 안중근은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의 후방에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자기 앞을 조금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브라우닝 8연발 권총으로 네 발을 발사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와의 거리는 불과 10 여보에 불과했다. 세발이 정확하게 명중되었고 그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의거 직후 잡혀 역구내 헌병파출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러시아 시심재판소(始審裁判所)의 검사와 한국인 통역으로부터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당일 저녁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는 10월 28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秀太郞)의 명령에 의해 뤼순에 있는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으며, 10월 30일부터 정식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재판은 불법적으로 진행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의 조차(租借) 지역이었으며,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따라서 일본법률에 의해 일제가 재판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목이나마 대한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제정러시아에 압박을 가해 안중근을 인도받았으며,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을 부당하게 재판한 것이었다. 일본 외상 고무라는 1909년 12월 2일 전문을 보내, 범행이 극히 중대함을 감안, 응징의 정신에 의거 극형에 처함이 타당할 것이라는 내용과 우덕순에서 대해서도 ‘모살 미수죄’를 적용할 것을 시사하고 조도선과 유동하에 대해서는 재량에 위임한다는 것을 지시했다. 즉 재판은 이처럼 고무라 외상의 지령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얼빈 의거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 나아가 일본을 위한 의거였다. 오늘날 일본, 중국에서도 안중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 외롭게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며 동양 평화를 추구했던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백과사전 자료)

 

 

안중근 광장 옆에 있는 주차장을 이전하였으면 좋겠다.

 

   

서울 일본군 「위암부」 피해자 기림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울의 중심에 있는 남산은 해발고도 270.9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서울의 중심부에 있다 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서울지하철 4호선 명동역과 회현역 사이의 회현사거리에서 남산방향으로 조금 오르면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오를 수도 있고 회현역과 명동역 동대입구역 등에서는 남산 타워로 가는 대중교통 버스가 수시로 왕래하기 때문에 남산을 오르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고 여겨진다. 오늘은 서울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하차하여 숭례문을 지나 서울성곽을 따라서 남산공원으로 올라 백범광장과 안중군광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